◆ 김기림(1908∼ ? )

◆ 약력

*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보성고등보통학교, 일본의 니혼 대학을 거쳐 도호쿠 제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

* 귀국하여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내면서, 조선일보에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같은 신문에 평론 <시의 기술 인식 현실 등 제문제>를 발표하며 문학 평론에도 뛰어들었다. 1933년 이상,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등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6년에는 첫 시집 <기상도>를 발표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으나 다음해 공산화된 북조선에서 월남하여 남한 정부 수립 즈음에 탈퇴하였다. 중앙대학교와 연희대학교 강사로 일하다 서울대학교 조교수가 되었고, 신문화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시기는 불명이다.

* T.S. Eliot에게서 영향받아 주지주의 이미지즘 시를 주로 썼다. 동시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기교주의를 비판하며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전체시'의 창작을 주장하였다. 그의 초기 시들은 자신의 이론에 지나치게 충실하여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흩어져 있을 뿐 시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런 결점들은 차차 극복되었다. 평론 면에서는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한국 시문학계의 한 전환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극적 생애와 저널리즘 지향성과 과학주의의 공존

■ 양왕용, 문학평론가

1. 서론 

김기림에 대한 연구는 문학적 생애인 평전과 시세계, 시론, 심지어 신문기자로서의 글쓰기 등에 대하여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심도 있고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김기림이 활약했던 1930년대부터 1988년 해금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비평과 서평, 논문과 학위논문, 단독 저서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일괄적으로 밝히기는 지면상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논문 중간 중간에 집중적으로 검토한 저서들을 각주로 밝히기로 한다.

논의의 순서는 탄생 100주년 기념논문이라는 점에서 김기림의 생애를 살펴보고 문학적 시기를 구분하여 시와 비평과 시론 등의 변모과정을 개관하기로 한다.  이번 기회에 지금까지의 성과들을 읽어 보니, 김기림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하나의 논문으로 정리하기는 지면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연구의 관점과 방법론에 따라 아직도 정치하게 연구할 여지가 많다는 점을 실감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연구는 필자가 김기림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첫 장이라는 점에서 감회가 뜻 깊다.

 

2. 유년기의 슬픔과 고독 (1908-1921) 

김기림은 1908년 5월 11일(음력 4월12일)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면 임명동(臨溟洞) 276번지에서 선산 김씨 병언(秉淵)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6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기림은 온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1914년(7세) 임명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한 유년기에 상처를 주는 충격적 사건이 생겼다.  그 해 가을에 유행된 장티푸스가 그의 어머니를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요즈음으로는 심각하지 않은 전염병이지만, 그 당시로는 치명적인 병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병으로 죽었다.  어린 기림에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가족들은 모처럼 얻은 아들의 피병에 과수댁 고모가 정성을 쏟았으며, 이 고모는 기림의 어머니 대신으로 유소년기의 기림을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집안 일 때문에 계모를 들인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그 당시, 16세로 성진에서 여학교를 다니며 곧 서울로 유학할 예정이던 기림의 셋째 누나 金信德이 어머니 무덤가에 가서 보름동안 울며 지내다가 같은 병으로 죽게 되어 충격에 충격을 더하게 되었다.  이 때 받은 상처로 그는 고독에 빠졌으며,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이 이 지상에서 갑자기 사라져 삶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이 자리 잡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외상이 된 것이다. 

그러한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백부에 의하여 영남지방에서 한문 독선생을 불러와 공부를 하고, 1918년(11세)에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는데 임명동에서 15리 떨어진 어촌에서 자란 8세 연상의 나주 김씨(19세)와 결혼도 한다.  그러나 첫 번째 부인은 3년 쯤 살다가 친정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그의 백부의 김기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다.  그 자신 자식이 없었기에 친 자식처럼 사랑했으며, 단호한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가르치는 방식보다 별도의 독선생 밑에서 공부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서울로 유학 갈 때의 학교 선택까지 관여하게 된다.

 

3. 소년기와 청년 초기의 열정적인 학구열 (1921-1929) 

앞에서 밝힌 백부 김병문의 김기림에 대한 관심으로 김기림은 1921년(14세)에 성진농업전수학교를 자퇴하고 드디어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된다.  어릴 적부터 명석하던 김기림은 그 당시에 서울의 최고의 명문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 중․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백부의 일제에 대한 거부감으로 결국 보성고등보통학교(수송동 44번지의 현 조계사자리)를 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부의 확고한 배일사상과 민족의식은 김기림의 학교 선정뿐만 아니라 뒷날의 문필활동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1940년대 말 일제에 의해 지속된 친일 잡지에 작품을 거의 발표하지 않아 친일문학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는 단초를 그의 백부가 제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기림은 재학기간 동안 성적도 극히 우수하고 특대생으로 반장을 지냈다.  그러다 3학년 때 부여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그 때 갑자기 발병한 둔종(臀腫)으로 휴학한 후 치료를 받았으나, 좀처럼 낫지 않아 결국 성진의 제동병원에서 수술을 받고서야 나았다고 한다.  그 치료 기간이 1년 가까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는 1년 후 복교할 것을 주변으로부터 권유 받았으나, 후배들과 공부하기가 쑥스러워 일본 명교중학(名敎中學) 4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김기림의 보성고보는 5년을 채우지 못한 3년으로 끝났으나, 훗날 그와 문단활동을 같이 하게 되는 이상, 이헌구, 김환태, 윤기정, 임화 등과 선후배의 인연을 맺게 된다.  이러한 일로 보아 동급생을 선배의 예로 갖추어야 하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동경 행은 1925년(18세)의 일로, 앞에서 언급한 선덕 누나와 2년 동안 함께 자취를 하게 되는 인연을 가지게 된다.  그의 학구열은 명교중학 시절에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4학년에 편입한 그는 2년 동안 다닐 학교를 1년 만에 그만 두게 된다.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문부성(文部省)에서 실시하는 대입검정시험에 합격하여 곧바로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검정시험 역시 우수하였는데, 그가 택한 대학은 일본대학이고 그것도 전문부 문학예술과였다.  

김기림의 학구열은 일본대학 전문부에 입학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그는 주야간 함께 등록하여 학점을 동시에 취득하였다.  저학년 때에 이미 학점을 다 취득하고 상급학년 때에는 자기 자신의 영역을 확정시켰던 것이다.  이 시기의 정신적인 충격은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1926년 가을 김기림의 정신적 지주였던 백부가 고향에서 별세한 일이다.  다음으로는 1927년 선덕 누나가 여의전 진학을 앞두고 갑자기 귀국한 것을 들 수 있다.  선덕 누나는 양부위독이라는 친부의 거짓전보를 받고 귀국한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귀국은 성진의 모교 보신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양부모를 모시라는 친부의 배려로 이루어졌으며, 귀국 이듬해 결혼하여 남편의 부임지 개성으로 이주한다.  이러한 충격에도 굴하지 않고 김기림은 1929년 3월 3년 만에 일본대학 전문부를 졸업한다. 

이상과 같이 김기림은 유년기의 어머니와 셋째 누나의 죽음, 일본 유학 시절의 백부의 죽음, 여섯째 누나와의 예기하지 못한 이별과 같은 고통들을 오로지 열심히 공부하는 학구열로 극복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의 독선생으로부터의 한문수업, 국경 변방 보통학교 수학 실력으로 서울 보성고보 진학, 1년 휴학을 극복하기 위한 일본 名敎中學 진학과 검정고시 준비, 그리고 3년 동안의 일본대학 시절의 주야간 동시 수강과 맹렬한 독서 등으로 슬픔과 고독을 이겨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정상적인 교육을 받기까지는 아버지의 경제력과 비록 보성교보 시절 1년 휴학하였지만, 당시의 문인들의 유행병이던 결핵에 감염되지 않은 건전한 생활습관과 건강한 체력과 용의주도한 성격이 작용한 점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동시대인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학구열은 청년 후기와 장년 전기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4. 조선일보 기자 시절과 초기의 문학 활동 (1930-1936) 

고향에서 1년 가까이 지낸 김기림은 1930년 4월 20일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게 된다.  그는 공채 형식으로 입사하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가 공채를 실시한 것은 단 두 번(1930, 1936)이다.  따라서 그는 첫 번째인 1930년의 입사 기자이다.  조선일보 자료에 의하면 1차 공채시험은 4월 15일에 치렀는데 예고 기사는 1940년 4월 1일자에 나와 있고 시험 실행기사는 4월 16일에 나와 있다.  전문학교 및 대학 출신 응모자가 백이십 명에 달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현재 시험 문제까지 확인되고 있으며, 그 수준은 상당하였다.  이 공채 시험에서 김기림은 최연소자(25세)로 이상재의 손자인 이홍직과 양재하 등과 함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동료 기자들의 김기림의 면모와 성실성에 대한 회고의 기록들도 있다.  그는 사회부에 배치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그는 기자로서의 정체성도 분명히 가지고 있었으며 속도감과 민첩성으로 인식되는 저널리즘의 속성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의 변화하는 모습과 모더니티 지향적인 도시생활의 속성도 저널리즘 종사자, 특히 사회부 기자의 시각으로 터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김기림이 시인과 비평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당시의 다른 문인들과는 경우가 다르다. 문인으로 가자에 발탁된 것이 아니라, 기자 생활을 하게 되면서 주로 조선일보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문인이 된 것이다. 

나는 일찍이 文壇에 나왔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구태여 나오려고 애쓴 일도 없다.  文壇이란 것은 일종 막연한 사회인데 그렇게 호적과 같이 분명하게 있는 것은 아니면서도 역시 등단하는데도 어떤 不文律인 표준이 있어서 꽤 정확하게 등용이 되는 모양이다. …(중략)…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히 신문기자였던 까닭에 자기 신문 학예란에 출장 갔던 기행문을 쓰기 시작한 데서 비롯했고 별다른 동기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문학을 한다는 것만은 스스로 결심했고 무엇이고 값있는 것을 만들어 보겠다는 욕심은 있었다.

위의 인용에서 “출장 갔던 기행문”이라고 밝힌 글은 김학동 교수가 1988년 수습한 전집에는 빠져 있다.  다행히 최근 한 연구자에 의하여 새 자료로 발굴되어 소개된 글이기도 하다.  제목은 <간도 기행>으로 1930. 6.12~6.26 조선일보에 12차례에 걸쳐 발표된 비교적 긴 기행문이다.

조선일보에 기명으로 발표한 첫 번째 글은 <간도 기행>이 아니다.  날짜별로 보면 두 번째에 해당된다.  1930.4.27~5.3까지 발표한「午後와 無名作家들-日記帖에서」가 첫 번째 글이다.  그런데, 김기림은 이 글을 문학적 글쓰기의 처음이 아니라 고 한다.    우선, 이 글의 부제인「‘일기첩’에서」를 주목해야 한다.  조선일보의 첫 번째 발표인 1930.4.27 「오후와 무명작가 (1)」서두에는 ‘1929.8.29’이라는 날짜가 기명되어 있다.  말하자면, 일기로 쓴 글이나 (2)부터 날짜가 없다.  그런데 이 날짜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김기림이 1930년 4월 20일에 조선일보에 입사하였으니 이 글은 입사하기 전의 일기인 셈이다.  내용을 보아도 그렇다.  (1)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오후에 젊은 화가 K군이 이곳서 삼십리 밖에 있는 S市로부터 그 장발과 푸른 모자와 우울한 걸음로 이 거리에 나타냈다. 올봄 이후로 문자 그대로 시골에 떨어지고만 나의 황색의 권태로 일관하는 그 날 그날의 살림살이에 K군의 돌연한 출현은 확실히 강렬한 진동을 던져 주었다.

  여기서 추측할 것은 “S시”와 “올 봄 이후로 문자 그대로 시골에 떨어지고 만”이라는 부분이다.  K군은 누군가 확인하기가 어려우나 S시는 성진시라고 보아진다.  따라서 이 글은 김기림이 그의 고향 임명동에 있을 때 쓴 일기이다.  “올 봄 이후로 문자 그대로 시골에 떨어지고 만”의 올 봄은 일본대학 졸업 후 낙향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김기림은 1929년 봄 일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것이 아니라, 고향 임명동에 낙향하여 있다가 1930년 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할 글은 최초의 문학평론이라고 볼 수 있는 「詩人과 詩의 槪念 - 근본적인 유혹에 대하여」이다.  이 글은 조선일보 1930.7.24~30에 발표된 글이다.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진통적인 시인과 시의 기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출발한다.  김기림의 현학적 취미가 다소 작용하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  시인과 시의 기능을 살펴보면서, 원시시대와 프랑스의 보들레르와 베르레느, 러시아의 경우는 공산혁명 이후에 주목하면서, 시인이 현실과 동떨어진 특정 계급이라는 생각을 추방하며, 생활 속의 시를 표방하고 있다.  특히, 현대를 자본주의 말기를 통한 퇴폐화의 경향으로 보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그의 초기 인식은 해방 직후의 그의 행보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슈르리얼리즘’, ‘담백한 센티멘탕리즘, 말초신경적 신감각주의, 그리고 감각의 교착과 환상’ 등을 현대에 나타난 부정적인 시의 속성으로 보면서, 그것을 심판해야 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시는 본질적으로 향략적 방편과 이상적 방편의 이원성을 포괄하고 있는 묘사이자 동시에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  말하자면 통합적 시관이다.

시는 제일 먼저 생활의 여기다.  시는 그리고 생활의 배설물이다.  그 경험적 기능을 통하여서도 그 실질적 가치를 통해서도 그 이상의 해답을 도출 할 수 없다.  우리들의 과거에 있어서 창조라는 말을 너무나 安價로 남용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상에서 그의 생활의 시론은 절정을 이룬다.  ‘부로조아로서의 시, 인체리겐차로서의 시, 노동자 농민으로서의 시’를 모두 허용하는 다양성의 시학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시는 직업도 아니고, 부업도 아니며, 각 계급은 그 계급에 충실한 시를 가져야 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그 자신은  모더니스트이고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선도자가 되는 저널리즘에 종사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시를 쓴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동아일보에 발표된「상아탑의 비극-샤포에서 초현실파까지」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김기림의 작품연보에 의하면, 1930년부터 동북제대 유학가기 전까지의 문학평론은 총 73편이며, 그 가운데 시론과 시 비평이 43편이다.  이와 같은 왕성한 문학 활동은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시론의 변모과정은 따로 살필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앞에서 살핀 생활의 시론이 시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바빌론’으로
    ‘바빌론’으로
    적은 女子의 마음이 움직인다.
    개나리의 얼굴이
    여린볕을 향할 때…….

    ‘바빌론’으로 간 ‘미미’에게서
    복숭아 꽃봉투가 날러왔다.
    그날부터 안해의 마음은 시들어저
    썼다가 찢어버린 편지만 쌓여간다.

    안해여, 작은 마음이여
    너의 날아가는 自由의 날개를 나는 막지 않는다.
    호올로  쌓아놓은 좁은 성벽의 문을 닫고 돌아서는
    나의 외로움은 돌아봄 없이 너는 가거라.

    안해여 나는 안다.
    너의 작은 마음이 병들어 있음을…….
    동트지도 않은 내일의 窓머리에 매달리는 너의 얼굴우에
    새벽을 기다리는 작은 不安을 나는 본다.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 가거라.
    너는 내일을 가저라.
    밝어가는 새벽을 가저라.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의 전문 (조선일보 30.9.6)


    거리로 지나가면서 당신은 본일이 업습니까
    가을 볏으로 짠 장삼을 둘르고
    갈대꼬깔을 뒷덜미에 부친 사람의
    어리꾸진 노래를――――
    怪常한 춤맵씨를――――
    그는 千九百五十年 최후의 市民――――
    불란서혁명의 末裔의 최후의 사람입니다
    그의 눈은 ‘푸리즘’처럼 多角입니다.
    世界는 꺽구로 採光되어 그의 白色의 카메라에 잡버집니다.
    새벽의 땅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에 그의 귀는 기우러지나
    그는 그 뒤를 딸흘 수 없는 가엽슨의 절룸바리외다.
    資本主義 第三期의 「메리, 꼬-라운드」로
    出發의 前夜의 伴侶들이 손목을 잇그나
    그는 차라리 여귀서 호올러 서서
    남들이 모르든 수상한 노래에 맞추어
    혼자서 그의 춤을 춤추기를 조와합니다.
    그는 압니다.  이윽고 「카지노폴리」의 奏樂은 疲困해 끗치나고 거리  는 잠잠해지고 말것을 생각지 마르세요. 그의 노래나 춤이 즐거운 것이라고 그는 슬퍼지는 人形이외다.
    그에게는 生活이 업습니다.
    사람들이 모-다 생활을 가지는 때
    우리들의 ‘피에로’도 쓸어집니다.
                -<슈-르 레알리스트>의 전문 (조선일보 30.9.3)


    가을의
    태양은 겨으른 화가입니다.

    거리거리에 머리 숙이고 마주선 벽돌집 사이에
    蒼白한 꿈의 그림자를 그리며 댕기는……

    ‘쇼-윈도우’의 마네킹 人形은 옷옷을 벗기우고서
    ‘셀루로이드’의 눈동자가 이슬과 같이 슬픔니다.

    失業?의 그림자는 공원의 蓮못가의 갈대에 의지하여
    살진 금붕어를 호리고 있습니다.

    가을의 태양은 ‘플라티나’의 연미복을 입고서
    피빠진 하눌의 얼굴을 산보하는
    침묵한 畵家입니다.
    -<가을의 태양은 ‘플라티나’의 연미복을 입고>의 전문 (조선일보 30.10.1)

㉠은 ‘GW’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1930.9.6)에 발표한 그의 최초의 시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첫 시집『太陽의 風俗』 (1939.9)에 수록된 작품이다.  앞에서 언급한 최초의 산문인 「午後와 無名作家들」(조선일보 30.4.27)과 최초의 시론 「詩人과 詩의 槪念-根本的 疑惑에 대하여」(조선일보 7.24~30)를 발표하고 난 뒤에 그것도 GW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몇 작품들 가운데 첫 작품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시 발표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시로서는 최초의 발표작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이 창작될 무렵 김기림은 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첫사랑이었던 이월녀와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것처럼 아직까지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나 헤어질 조짐을 보이는 시기는 아니다.  다만, 그녀는 멋진 여성이고 서구적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의 갈등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월녀와는 그녀의 불임으로 31년 겨울에 헤어지고 그의 미망인으로 3남2녀의 어머니로 1991년까지 생존한 신보금<호적명 김원자>과 1932년 1월 고향에서 중매결혼을 한다.  시적 화자 ‘나’나 시적 청자 ‘너’는 김기림과 이월녀가 아니라 객관화된 가상화자로서 ‘나’와 가상청자 ‘너’가 설정된 것이다.  남편 ‘나’가 아내 ‘너’에게 바빌론으로 가라고 하는 시적 상황에서 이 시를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내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 자체가 시의 모티브를 제공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정확한 의미 파악은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바빌론은 바벨론으로도 발음되는데 BC 2000년경부터 BC 539년까지 구․신 바벨론으로 나누어 번성한 중동지역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에 발달한 고대문명국가 바벨론의 수도로 현재 바그다드 남쪽 80㎞지점에 있는 고대도시이다. 

BC 539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게 완전히 멸망한 바벨론 제국의 역사는 구약성경에 유대 나라를 멸망시키고 많은 국민들을 포로로 끌고 갔기 때문에 구약 「열왕기하」「역대 하」『에레미야』『다니엘』『에스더』등에 BC 587년 유다의 멸망과 이로 인하여 바빌론으로 끌려간 포로 시대의 역사와 개인 전기 속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선 지명이 아니다.  바빌론 전성기인 느부갓네살 왕의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공중정원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이다.  그 이외 발굴된 유적이 많이 있다.  그러나 김기림은 이러한 구체적인 문명적 배경보다는 신비로운 문명을 꽃 피운 화려한 도시의 의미로 설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고대 문명에까지 김기림의 교양이 미치고 있는 점도 앞으로 그의 시에 나타나는 현학 취미의 징조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시적 청자 아내가 ‘미미’의 복숭아 꽃 봉투를 받고 동경하는 도시는 아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라기보다 김기림이 지향하고자 하는 시적 세계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향성을 나와 아내, 그리고 ‘미미’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객관화시켰다는 것은 그 당시의 수준으로 보아 형상화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문명세계 바빌론을 아내 ‘너’의 병든 마음을 치유할 ‘새로운 생활’ ‘내일’ ‘밝아가는 새벽’으로 본 것은 고뇌 없는 낙관론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는 있다.  그리고 막연한 문명지향성이므로 이 작품에서는 모더니티 지향성의 흔적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

㉡의 경우는 김기림의 두 번째 작품으로 ㉠으로부터 정확하게 24일 뒤인 30년 9월 30일 조선일보에 발표된 작품이며, ㉢은 ㉡ 바로 뒷날인 30년 10월 1일 역시 조선일보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런데 ㉡의 경우는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이다.  그 까닭은 이 작품을 해석한 후에 어느 정도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은 시적 의미를 한 마디로 규정하면 슈-르 레알리스트, 즉 초현실주의자에 경멸감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김기림의 태도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최초의 시론 「詩人과 詩의 개념」(조선일보 30.7.24~30)에서 피력한 바 있다.  시의 첫 부분에 초현실주의자들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가을 볕으로 짠 장삼을 두르고” “갈대꼬깔을 뒷덜미에 붙인 사람이 어리꾸진 노래와 과도한 춤을 추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1950년 최후의 사건으로 1930년으로부터 20년 후의 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야말로 꼴불견의 극치이다.  그들의 수상한 노래에 맞추어 추는 춤은  노래에 흥을 즐기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슬퍼지는 인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초현실주의자들이 이 당시로서 굳이 찾는다면 이상(1910~1937)이 되겠으나, 이상과 김기림의 우정이나 인연으로 보아 그를 염두에 두고 비난한 것은 아니다.  1930년 이후의 김기림의 시작 경향을 이렇게 경멸한 프랑스의 초현실주의를 모더니즘 혹은 모더니티 지향성으로 본다면, 이러한 경향의 한 축인 영미모더니즘과 이미지즘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변하여 간 김기림 자신의 시작 경향의 변화에도 기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 이 시점의 김기림의 시론인 ‘생활 속의 시’로서는 초현실주의자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론의 지향점이 그대로 노출된 부분이 끝 부분 “그에게는 업습니다/사람들이 모다 생활을 가지는 때/우리들의 피에로는 쓸어집니다”에서 현실을 초월하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는 신문기자로서도 충실하고 평론가 시인으로서도 열심히 살았던 건전한 생활인이다.

㉢의 경우는 비록 ㉡보다 하루 늦게 발표하였으나, 김기림의 초기 시의 대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김기림은 이 작품을 첫 시라고 꼽고 있다. 시의 처녀작을 묻는 질문에 “1930년 秋 첫 시 <가을의 太陽은 풀라티나의 연미복을 입고>를 조선일보에 발표”라고 답한 것이 그것이다.  이 당시 동북제국대학 영문과에 재학하고 있던 30세 때의 기억인데,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를 처녀작으로 꼽지 않은 것은 이 작품에 대한 김기림의 애착을 엿볼 수 있다.  ㉠과 ㉡에 비하여 ㉢은 훨씬 절제된 시어와 형태 그리고 이미지의 구축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우선 규칙적이고 빈번한 행과 연 구분이 시도되고 있는 점이 특색이고, 비유적인 표현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가을의 태양을 “게으런 화가”로 은유하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보다 감각적으로 “폴라티나의 연미복을 입고 피빠진 하늘의 얼굴을 산보하는 침묵한 화가”로 더욱 구체적으로 은유를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주목할 부분은 표현은 “폴라티나의 연미복”에서 ‘폴라티나’의 사전적인 해석이다.  폴라티나(platina)는 백금을 영어로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가을의 태양은 풀라티나의 연미복을 입고서”라는 이 부분만 놓고 본다면 분명히 백금반지에서 연상되는 백금의 귀금속으로서의 가치와 신비롭고 눈부신 속성을 표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가을 하늘의 파란 색상과 대비되는 백금 태양은 무척 감각적이고 그에 따른 정서를 자아낸다.  그러나 이 부분은 시작을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연의 게으른 화가의 이미지, 둘째 연의 벽돌집 사이의 창백한 꿈의 그림자, 셋째 연의 쇼 윈도우의 마네킹의 옷 벗은 모습과 셀루로이드 눈동자를 직접 이슬과 같이 슬퍼하고 한 것, 넷째 연의 실업자의 그림자, 그리고 마지막 연의 비록 백금 연미복을 입었지만 피 빠진 하늘의 얼굴, 즉 창백한 하늘의 얼굴을 산보하는 침묵한 화가라는 사물들은 한결같이 우울한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사물들이고 이미지들이다.

1930년부터 1936년 동북제대 재학하기 전까지의 시작 활동은 중간의 공백기에도 161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의 시작 태도도 미세한 변모를 시도하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따로 살피기로 하고 우선 초기 시는 김기림의 생활의 시론을 구현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이렇게 시론과 시 뿐만 아니라 소설 3편, 희곡 5편, 수필 57편 등 다양한 장르로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희곡 5편을 모두 초기에 썼다는 점에서 이 당시의 문학 전반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해는 1935년이다.  시를 가장 많이 발표한 해는 1934년으로 64편이나 발표하였다.

시의 경우 1935년은 1934년에 비하여 훨씬 적은 20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인 장시『氣象圖(총 424)』를 월간『중앙』 5월 초와 7월 초, 『삼천리』11월과 12월 초에 발표하였다.  이 장시는 김기림이 동북제대 유학시절인 1936년 7월 창모사에서 이상의 편집과 장정으로 시집으로 엮어졌으며, 이것은 발행일로 보면 그의 첫 시집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에즈라 파운드와 엘리옷의 영향, 특히 엘리옷의 장시『황무지』와 비교문학적 연구도 많이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당대의 평가도 그렇고 오늘날의 평가도 긍정적이지는 않다.

시론의 경우 가장 많이 발표한 해이다.  즉, 66편 가운데 23편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발표양상은 이미 다른 사람의 연구에서 자세히 살피고 있다.
 그의 첫 시론집인『詩論』(백양당, 1947)의 글들 가운데 15편이 비록 개체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나 1935년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5. 동북 제대 유학 시절과 청년후기의 과학주의 (1936-1945)

1936년 4월 김기림은 일본의 仙臺에 있는 東北帝大 英文科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東京의 早稻田대학과 동북제대 두 군데 다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자유분방한 조도전대학보다 국립대학, 그것도 동경과는 거리가 먼 조용한 도시 선대에 있는 동경제대, 경도제대에 이어 세 번째로 설립된 제국대학인 東北제대를 선택하였다. 

그는 일본대학 전문부 졸업자이기 때문에 2학년에 편입되어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I. A. Richards는 물론 미국의 신비평가의 이론도 접하면서 시문학 이론을 더욱 다진다.  이 때 東北帝大 英文科가 속한 법문학부에는 미학전공의 阿部次郞과 영문학 전공과 土居光知, 외국인 교수 랄프 호치슨 같은 쟁쟁한 교수들이 강의를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I. A. Richards의 제자인 W. Empson이 동경제대 교환교수로 와 있었는데, 김기림이 한 때 그의 강의를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후 영문과 土居光知 교수의 지도로 I. A. Richards의 시론에 대한 연구를 학부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였다고 한다.
유학시절에 주목할 만한 글은 문학평론 2편이다.  그는 조선일보 36.2.21~26에 「科學과 批評과 詩―현대시의 실망과 희망」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35년 작품의 게재 여부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詩論』(백양당, 1947, pp.32~41)에 같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가 시론과 문학평론 속에 ‘과학’이라는 용어를 표면적으로 구사한 첫 작품이다.  아마 동북제국대학에서 I. A. Richards를 공부하면서 쓴 글이기에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리차즈의 방법론의 두 측면인 의미론과 신경학에까지 이르지 않고 있으나, 과학적 태도로 시를 비평하여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본격적인 과학주의 시학의 첫 출발이 바로 이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 말미에 이상의「危篤」(조선일보, 1936.10.4) 이 그 자신이 지향하는 현대의 진단서라고 호평하고 있다. 

다음으로 동북제국대학 졸업 시기인 1938년에는 오직 한 편의 평론만 발표한다. 아마 졸업반이라 학업의 마무리와 졸업논문을 작성하는 데 힘을 쏟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 평론은 「現代詩와 詩의 르네상스」(조선일보 4.10~16)인데, 이 작품 역시 『詩論』에 「詩의 르네상스」라고 개제되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1937년과 1938년 2년 동안 시집 출판 붐 현상에 대한 평론이다. 

김기림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조선일보 사회부장이 되어 폐간될 때까지 사회부장으로 있었다는 누나 김선덕의 증언 때문에 대부분 사회부장으로 복귀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 조선일보 사보에 의하면 동북제대 유학 후인 1938년 학예부로 진입하여 1939년 4월 학예부 차석으로 있다가 폐간되는 해인 1940년 1월 학예부장이 된 사실이 밝혀졌다.  1939년 귀국 직후 장남 세환의 서울 취학을 위하여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서울 종로구 충신동 62의 110으로 이사를 하였다.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간될 때까지 그는 학예부장이었으며, 폐간호에 그 당시의 신진 시인인 서정주에게 폐간호에 실을 시를 청탁하였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귀국한 이후의 김기림의 변화는 조선일보에 글 쓰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었으며, 시의 경우 『여성』(「나비와 바다」1939.4), 『조광』(「連禱」1939.5;「겨울의 노래」 1939.12;「海洋動物園」시편, 1939.7; 「요양원」「산양」, 1939.9),『문장』(「에노시아- 續東方紀行詩」1939.5-癩戶內海-續東方紀行詩-1939.7) 등 주로 잡지에 발표하고, 수필과 평론을 간혹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아마 그 동안의 신문의 편집 체제가 바뀐 탓도 있겠으나, 발표매체가 다양해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기림의 창작의지와 집필의지가 다소 후퇴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발행을 미루어 왔던 시집 『太陽의 風俗』(학예사, 1939.9.6)을 내고 각종 매체에 시, 수필, 평론 등을 조선일보가 폐간되기 전까지는 꾸준히 발표한다.  다음으로, 김기림이 동북제국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1930년 전후로 일제의 탄압정치가 강화된 탓으로 한글의 문학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이 점차 어렵게 된 상황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1938년 이후부터 조선어 사용 금지령이 공포되고, 1939년 11월에는 창씨개명 법령이 공포되는 등 1940년 2월부터 8월까지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정책이 시행된다.  김기림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곤노(金野)’라는 성으로 개명하였다. 

1940년 7월에는 아버지 김병연이 고향에서 사망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8월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강제 합병하는 형식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김기림은 일자리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 대신 재산을 관리하며 지낸다.  

일제 말기 김기림이 머물었던 또 하나의 공간은 고향 가까이 있는 鏡城이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鏡城中學校(경성고보가 학제개편으로 개명)의 영어교사와 수학교사를 하였던 것이다.  이 때 김기림의 행적은 그의 제자 시인 김규동에 의하여 여러 곳에 소개되고 있다.  그는 혼자서 하숙을 하며 학구적이고 열성적인 교사생활을 하였다.  즉, 도서실의 책을 한아름 안고 퇴근하였으며, 2차 대전 발발로 영어 과목이 적국어라는 명분으로 줄어지자 수학을 열심히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문예반 학생들에게 문학에 관한 독서나 창작보다 영어 공부와 과학 공부를 강조하였다.  그에 대한 다른 일화들과 일제 말기를 살아가는 지성인, 그것도 제국대학 출신이 시골 중학교 교사로 살아가는 모습이 김규동에 의하여 후세에 전하여 진다는 것이 퍽 다행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는 결국 1944년 경성중학교 교사직도 사임하고 고향 임명동에서 칩거하여 1945년 8월15일의 해방을 기다린다. 

이상과 같은 일제 말기의 삶의 역경에서 그의 비평과 시의 세계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다음 차례이다.  문학작품 연보에 의하여 1936년에서 1945년 해방 전까지의 작품 활동을 통계처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연 도

수필

평론

시론(時論)

기타

1936. 4~12

3

4

1

1

1

1937

 

3

1

 

1

1938

 

 

1

 

 

1939. 1~3

 

1

 

 

 

1939. 4~12

17

5

4

 

 

1940

1

10

10

2

 

1941

2

1

1

 

 

1942

3

2

 

 

 

1943

 

 

 

 

 

1944

 

 

 

 

 

1945.1~8

1

 

 

 

 

27

26

18

3

2

이 도표에 의하면 동북 제대 유학시절 작품 활동이 저조하고 일제 말 43년 이후에는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친일매체만 존재하던 일제 말 암흑기에는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는다.  1939년 4월부터 1945년 8월14일 사이의 평론으로 주목할 것은 다음과 같다.

㉠ 科學으로서 詩學 (《文章》,1940. 2) (『詩論』,〈백양당> pp9~20에 「詩學의 方法」으로 개제하여 수록)
㉡ 詩의 科學 과 會話- 새 시학의 기초가 될 언어관(人文評論, 1940. 5) (『詩論』(<백양당> pp21~31)에 「詩와 言語」로 개제하여 수록)
㉢ 詩의 將來 (조선일보. 8. 10 폐간호), (詩論, (백양당, 1947)에는 미수록, 김학동 편 전집② pp338-340에 수습되어 있음)

  ㉠과 ㉡의 경우에는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의 첫 시론집인『詩論』(백양당,  1947)의 첫 부분 「方法과 詩論」(pp.7~54)에 수록되어 해방 후 그가 납북되기까지 대학에서 강의할 때 그의 시론의 가장 근본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첫 제목에 나타나고 있는 ‘科學’이라는 부분으로 보아 그의 과학주의 시학의 근간이 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그가 동복제국대학 시절에 공부한 I. A. Richards의 언어학과 심리학에다가 김기림 자신의 견해인 사회학을 기반으로 한 시학을 바탕으로 씌여진 것으로 일본대학 전문부 시절의 작품들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게 씌어졌으며, 초기부터 지속되어 온 시적 언어의 유기성을 강조하는 과학주의 시학이 훨씬 강화된 견해들이다. 

다음으로 ㉢은 조선일보 폐간호에 발표된 작품들이라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조선일보 폐간은 갑자기 다가온 것이 아니라 예고된 폐간이었다.  1939년 12월 중순경 총독부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정식으로 폐간을 요구한다.  일제 건국기념일인 기원절(2월 11일)에 맞추어 폐간계를 제출하게 되어 있었으나, 동아일보 고문 송진우의 노력으로 일단 고비를 넘긴다.  조선의 언론에 온건정책을 펴 온  요나미 내각이 1940년 7월24일 무너지고, 1937년 6월 45세의 젊은 나이로 정권을 잡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인에게 내선일체를 강요했던 고노가 제2차 내각을 출범시키게 된다. 결국 고노내각이 정식으로 들어선지 20일도 안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강제폐간을 당하게 된다. 

김기림은 폐간호를 만들 때에는 냉철함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지식인이라는 자세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행진곡」같은 비정한 시를 서정주에게서 기대하였을 것이다.  폐간호에 서정주시를 게재하는 의도는 끝내 실패하고 펜을 들어 쓴 것이 ㉢「詩의 將來」이다.

시단에는 근년에 다시 일련의 어두운 노래가 성장한다.  그것은 어느새 「센티멘탈리즘」의 재생인 듯한 인상조차도 주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암흑은 암흑인 때문에 애완되고 절망조차도 연모되는 듯하였다.  그것들이 집단의 체험으로 심화되지 못하는 동안은 격정의 「딜레탄티즘」에 그치고 말 것이다.
어떤 정치가가 정확하게도「복잡괴기」하다고 형용한 이 전환이의 복잡괴기한 운무를 뚫고 시는 어쨌든 적으나마 끊임없는 閃光이라고 하겠고 그러함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전령일수 있고 또한 다시 집단의 소유로 돌아갈 것이다.             
                                                 -(詩의 將來「조선일보」1940. 8. 10 맨 끝부분 )

  사뭇 비감하기까지 한 논조로 암흑을 노래한 시의 대중적 호응을 바라고 있는 것은 그의 상황의식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다음으로 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日曜日 아츰마다 陽地 바닥에는
    무덤들이 버슷처럼 일제히 돋아난다.

    喪輿는 늘 거리를 도라다 보면서
    언덕으로 끌려 올라가군 하였다.

    아모 무덤도 입을 버리지 않도록 봉해 버렸건만
    黙示錄의 나팔소리를 기다리는가 보아서
    바람소리에조차 모다들 귀를 쭝그린다.

    潮水가 우는 달밤에는
    등을 일으키고 넋없이 바다를 구버본다.
                               -<共同墓地> 전문 (『人文評論』1940. 10)


     ㉡ 모-든 빛나는 것 아롱진 것을 빨아 버리고
    못은 아닌 밤중 지친 瞳子처럼 눈을 감았다.

    못은 수풀 한복판에 뱀처럼 서렸다
    뭇 호화로운 것 찬란한 것을 녹여 삼키고

    스스로 제 沈黙에 놀라 소름친다
    밑 모를 맑음에 저도 몰래 으슬거린다

    휩쓰는 어둠 속에서 날(仞)처럼 흘김은
    빛과 빛깔이 녹아 엉키다 못해 식은 때문이다

    바람에 금이 가고 비빨에 뚫렸다가도
    상한 곳 하나없이 먼동을 바라본다
                                      -<못> 전문 (『春秋』 1941. 2)

㉠의 경우는 동북제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인 1940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김기림은 귀국한 뒤의 첫 작품인 「바다와 나비」는 원래「나비와 바다」라는 제목으로 잡지 『여성』(1939. 4)에 발표되었으며, 제 3시집 『바다와 나비』(신문화연구소. 1946. 4)를 발간할 때 시집 제목으로 채택되면서 개제되어 정착되었다.  .  이 작품에 대한 정치한 해석들이 많다.  그리고 이들 해석의 공통점이 초기의 시와는 전혀 다른 정감을 노래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보다 한 달 먼저 『조광』(1939. 9)에 발표된 <요양원>에서 사람마다 가슴 속에 암종을 가졌다고 상황의식을 형상화한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을 ‘공동묘지’로 인식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특히 공동묘지에서 무덤들이 버섯처럼 일제히 돋아나는 시간이 일요일 아침이다.  일요일이면 안식과 평안을 상징할 수도 있는 시간인데 이 시의 화자는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인식의 변화를 대비 할 초기의 시를 인용해보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질 것이다.


         火
           水
              木
                 金
                    土
    하낫 둘
      하낫 둘
    일요일로 나가는 「엇둘」소리.......

    자연의 虐待에서
    너를 놓아라
    역사의 餘白.......
    영혼의 위생「데이」.....
    일요일의 들로
    바다로.....

    우리들의
    유쾌한
    하눌과 하로
    일요일
        일요일
                               -<日曜日行進曲> 전문(『신가정』1933.11)

1930년의 일요일은 유쾌하고 희망적인 일요일이었다.  바다로 들로 나아가 영혼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일요일이 1940년에는 무덤들이 버섯처럼 돋아나는 일요일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무덤도 입을 벌리지 않도록 봉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묵시록의 나팔소리를 기다리니 바람 소리에 개인이 아닌 모두가 귀를 쫑그리고 있다는 인식은 미래에 대한 짐작, 즉 일제의 패망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묵시록의 나팔소리는 다분히 묵시록적 이미지라 볼 수 있지만, 그 나팔소리에 귀기우리는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고 전체인 것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김기림 자신이 이 작품과 같은 지면에서 발표한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에서 말한 ‘모더니즘’과 ‘사회성’의 종합이라는 뚜렷한 방향을 찾은 시이다. 

㉡의 경우는 조선일보의 폐간으로 낙향하여 있다가 경성중학 영어교사로 부임한 시기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발표 되고난 2개월 후인 1941년, 4월 『文章』과 『人文評論』은 폐간되고, 『人文評論』주간 최재서는 일제에 협력하여 친일지『國民文學』을 발간하면서, 친일문학의 길을 걷게 된다.  김기림은 최재서의 『인문평론』에 글을 달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고향 임명동으로 돌아간다.  아마 이것은 그의 백부로부터 물려받은 민족의식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씌여진 작품이 바로 ㉡이다.  이 작품의 주도적 이미지 즉, 작품상징은 ‘못’이다.  원래 못은 밑바닥이 드러나고,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도 보이고 드리워진 나뭇가지들의 모양도 그림자 지는 아름다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김기림의 못은 못이 라기 보다는 늪의 형상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한낮의 못이 아니라 밤중 지친 동자처럼 한낮의 아름다운 모습을 온통 삼켜버린 못이 이 작품의 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못을 ‘수풀 한복판에 밤처럼’ 또아리를 뜰고 잇다는 직유는 더욱 공포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공포의 못으로서 이미지는 바로 1941년의 시대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못은 스스로 침묵에 놀라 소름치고, 못의 속성인 맑음, 그것도 밑 모를 맑음에 더욱 놀란다.  침묵과 밑 모를 맑음은 대립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 속에는 못의 긍정적 상징성이 들어있다.  늪처럼 불투명하고 혼탁한 이미지가 아니라, 전율을 느끼는 맑음의 이미지, 이것이 언젠가는 회복될 조국이라고 상징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날을 위하여 침묵하는 지식인 그가 바로 김기림이다. 넷째 연에 형상화된 못은 더욱 상징적이다.  캄캄한 어둠에 오히려 물은 빛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모습을 어둠 속에서 칼날처럼 눈을 흘긴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빛나는 것이 빛과 빛깔이 녹아 엉키다 못해 식은 때문이라고 본 것 역시 오랜 사유와 명상 속에서 얻어진 비유이다.  끝 연에서 바람에 금이 가고 빗발에 뚫렸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한 곳 없이 먼동을 바라본다는 인식 또한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부분이다.  적절한 비유와 정신적인 깊이를 느끼는 결과로서의 사유로 인하여 이 시 역시 ‘모더니즘과 사회성’을 결합한 작품인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결과 그는 경성중학에서 절필에 가까운 침묵으로 일관한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친일문학의 멍예를 벗었다.  그 때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과학주의와 영어교육에 신경을 쓰면서 절제하는 모습이나 일화 역시 많이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이 그는 동북제국대학 유학 이후와 일제 강점기 말에, 평론가로서나 시인으로서 초기와는 다른 모습으로 과학주의를 실천하고 모더니즘과 사회성의 균형을 유지한 셈이다.  그리고, 뚜렷한 상황의식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바탕에서 해방공간의 김기림의 시론과 시를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6. 해방공간에서의 민족의식과 아카데미즘

김기림의 해방공간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도 않아 여러 가지 설과 견해가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자진 월북이 아니라 강제 납북이라는 점에서는 원칙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김기림은 해방을 그의 고향 임명동에서 맞았다.  그는 경성중학교 교사를 1944년에 그만 두고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그가 머물고 있던 고향 성진은 해방직전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38 이북 적화야욕의 일환으로 군대를 상륙시켜 전투를 한 곳이다.  말하자면, 공산화의 최전방이었으며, 지주계급인 그로서는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아들 중 서울에서 공부하던 큰 아들 세환을 제외한 자녀들을 고향에 두고 9월말 서울로 내려온다.  서울에 내려와서는 문단적으로는 좌파인 임화와 김남천이 주도하는 조선문화협의회에 관여하고, 이어서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시분과위원장과 서울시문학가동맹위원장으로 활동한다.  九人會시절의 동료, 정지용, 이태준, 박태원과 조선일보 시절의 이원조 등이 관여한 좌파이기 때문에 친소관계로 쏠렸다고 볼 수 있으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볼 문제는 아니다.

김기림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주최하는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시분과 위원장자격으로 「우리 詩의 方向」(1946.2.8) 이라는 강연을 하였다.  일종의 해방을 맞은 한국시단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이 연설문은『시론』(백양당, 1947.11) pp193~204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론과 같은 해에 발표한 「共同體의 發見」(『문학』, 1946.7), 「새로운 詩의 生理」(‘경향신문’ 1946.10.31) 「詩와 民族」(신문화, 1947)은『시론』에「우리 詩의 方向」이라는 별도의 장에 함께 (pp.191~218) 수록되어있다.  따라서, 『시론』에 수록된 글 가운데 1947년 11월로부터 가장 최근의 글이 바로 이것들이다.

「우리 詩의 方向」에서는 결코 좌파적 시각은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정치와 시가 서로 기피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과 시 정신의 자유와 민족의 자기반성 등을 언급한 후 민족과 시대의 선두에 시가 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민족주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좌파가 주도하는 문학자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 결과적으로 좌파가 주도하는 문학자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상과 같은 문단활동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1947년 평양을 거쳐 고향에 가서 가족들을 솔거하여 밀항선을 구하여 동해로 탈출하여 서울로 돌아온다.  1948년초에는 가산 정리 차 두고 온 부인과 막내 세운까지 북한을 탈출하여 온 가족이 이화동 자택에서 거주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서울 사범대, 중앙대, 연희대 등의 전임으로 동국대 국학대 등에는 시간강사로 출강한다.   

김기림이 이 시기에 힘을 쏟은 것은 문학평론활동이나 시작활동도 포함될 수 있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학 강의 교재와 학술 서적의 간행이었다.  1946년 12월 『문학개론』(문우인서관)의 발간을 필두로 앞에서 자주 언급한 『시론』(백양당, 1947.11), 번역서 『과학개론』(1948.6)등을 간행하였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좌파들의 단속이 심하여졌다.  그 전에 이미 이원조, 임화, 이태준 등은 자진 월북하였고, 남아있는 좌파 가담자들은 전향서를 쓰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김기림은 좌파이념지향성도 아니었으나, 조선문학가동맹에서의 행적 때문에 전향서 작성과 보도연맹 가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1948.8.15이후로 김기림은 전향을 하게 된다.  그런 후에도 수필집『바다와 육체』(평범사, 1948.12), 『문학개론』은 5판(신문화연구소, 1949.7)까지 내고, 『교양서적-학생과 학원』(수도문화사, 1950.3), I.A.Richards 『문예비평의 원리』를 자기 나름대로 수용하고 변형시킨 『시의 이해』(을유문화사, 1950.4), 역시 I.A.Richards 이론과 다른 서구 학자들의 이론을 참고한 『문장론 신강』(민중서관, 1950.4)등을 야심차게 발간하였다.

그러나, 문학가 동맹 출신 문학인들은 대한민국 건국과 더불어 정신적 위축감을 안게 되었다.    6.25가 발발하자 보도연맹가입이 서울을 점령한 북한 측으로서는 배신자이고, 지주계급 출신인 신분 때문에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가족들과 친지들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정치보위부에 의하여 북으로 끌려가 역사의 미아가 돠고 말았다.

어디 6.25사변의 희생자가 김기림뿐일가마는 김기림 같은 서구문학이론의 선구자로 용의주도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40세 초반의 건강한 학자가 어디서 어떻게 최후의 죽음을 맞았는가 알 수 없게 만든 민족분단의 비극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고 있다.

해방공간의 김기림은 이렇게 평론가로 혹은 학자로의 행보는 뚜렷하였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면모는 정지용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해방에 감격한 나머지 일종의 경우의 시, 즉 축시나 행사시 같은 작품만 남기고 말았다.

비록 『새노래』(아문각, 1948.4)라는 시집을 한 권 남겼지만, 그는 시인이기 보다 학자로 아카데미즘을 연 선구자이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는 6.25사변이라는 격랑에 앞으로 위대한 시론가로 성장할 수 있는 소장 교수 한 사람을 잃고 말았다. 

 

7. 결론

김기림은 일제강점기 동안 유년기와 소년기, 그리고 청년기를 보내면서 비록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어린시절에는 어머니를 여의고 고독하게 살았고, 세 번째 부인과 결혼한 후에야 안정적인 가정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불행에도 불구하고 그의 용의주도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일본유학을 두 번이나 다녀오면서 한국 최고의 지성인이 되었다.  그는 신문기자로서도 철저한 삶을 살아 비록 모더니즘 과잉의 시론과 시를 창작하였으나, 그것은 저널리즘 지향성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시와 삶을 분리하면서도 생활의 시론을 주장하고 시인도 철저한 생활인이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특히 2차 유학시절에 다진 I.A.Richards의 이론을 바탕으로 과학주의 시학을 주장하였으며, 해방공간에서의 대학 강단에서 그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만약 6.25사변이라는 민족 비극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다면 김기림으로 인하여 한국시는 보다 원숙한 서구 이론을 바탕으로 더욱 성숙하지 않았을까 가정해 본다.

앞으로 보다 정치한 논문들이 많이 나와 지금보다 더욱 진전된 김기림 연구가 전개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