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부(白雪賦)                                        -김진섭-

이해와 감상

‘백설부’는 우리 현대 문학에서 본격적인 수필가로 평가받는 김진섭의 대표작이다. 전체적인 요지는 눈이 지상(地上)의 모든 것을 덮음으로써 그것들을 하나같이 순결하고 아름답게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의 눈이란 검게 오염된 세계에 대한 흰색으로의 정화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기다리고 동경하던 계시를 마주하게 된다. 말라붙은 풀포기조차 눈으로 흰 꽃을 단다고 했을 때, 생활은 곧 말라붙은 풀포기이고, 참된 의미는 백설로 장식된 꽃에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실제 생활은 무의미하고, 눈 덮인 세계만이 의미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이 의미가 있는 것은 현실 생활의 비속(卑俗)함과 관념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대응시키면서, 생활의 철저한 멸시를 통해 역설적으로 생활에 한없는 애착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에 '부(賦)'라는 것을 붙인 것은 한시의 운율을 염두에 둔 까닭인 듯하다. 감상을 중시하는 부(賦)의 성격을 빌어서, 혼자만의 개별적인 정서를 마음껏 노래하려고 한 의도로 보인다. 빼어나게 유장하고 사무치게 현란한 백설에 대한 찬탄, 더 이상 다른 말로 바꿀 수가 없는 적확한 묘사들, 백설부 이후 우리 수필은 이 한편을 넘어설 백설 예찬을 가지지 못한 듯하다.

 요점 정리

성격 : 경수필, 서정적 수필 → 주관적, 예찬적

표현 :

    ① 대상의 주관적 파악으로 독창적인 의미 부여

              ② 다양한 비유를 통해 대상을 제시

              ③ 독특한 만연체의 문장 구사

              ④ 한문투의 문장과 어려운 한자어를 구사하여 장중한 맛을 나타냄.

의의 : 사고와 관념을 바탕으로 전문적 수필 세계를 보여 주는 작품

주제 : 생활에 지친 우리에게 위안과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는 눈에 대한 예찬

출전[조광](1939)

생각해 보기

1. 작가가 눈에 대해 가장 예찬하고 있는 속성이 무엇일지 찾아보라

   ▶ 모든 것을 덮어 희고 아름답게 해주며, 이로 인해 신비감을 준다는 점

2. '부(賦)'라는 문체의 특징을 이 글을 통해 짐작해 보자.

   ▶ 고풍스럽고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주관적이고도 감상적인 느낌을 줌.

3. 작가인 김진섭 수필의 문체에 대하여

   ▶ “김진섭이 수필을 쓰던 1930년대 한국어는 그 정신사적 차원에서 열린 세계로의 관념어가 아니라 이와는 역방향(逆方向)에 서기를 강요하였다. 이태준이나 정지용의 작품이 보여 주는 토속적, 내간적, 비문화적 감각어로의 지향성이 판을 쳤음을 감안한다면 청천의 관념어는 이와 대립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리에서 보면 그의 수필 문장은 누구나 쉽사리 비판할 수 있다. 오늘날은 한국어 자체가 관념어에 대한 상당한 탄력성을 이미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어의 관념어의 수준에서 김진섭에 견줄 만한 단 한 사람의 수필가도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에 김진섭의 수필은 도전의 대상으로 우뚝 솟아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김진섭의 수필이 보여주는 철학적 관념어가 당시 문학 작품에 유행한 토속어(土俗語), 조선 시대 여성의 내간을 흉내낸 듯한 문체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말해 준다.

                                                                               - 김윤식, ‘한국 근대 문학 사상 비판’ 중에서 -

 작품 읽기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 지 몰라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눈을 즐겨하는 것은 비단 개와 어린이들뿐만이 아닐 것이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고요한 환호성을 소리 높이 지르는 듯한 느낌이 난다. 눈 오는 날에 나는 일찍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거리에서 보지 못하였으니, 부드러운 설편(雪片)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지릴 때, 우리는 어찌된 연유(緣由)인지, 부지중(不知中) 온화하게 된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目禮)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눈을 좋아하는 사람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 태고(太古)의 음향을 찾아 듣기를 나는 좋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抒情詩)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가면 최초의 강설(降雪)에 의해서 멀고 먼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들어오는 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舊殼)을 탈(脫)하고 현란한 백의(白衣)를 갈아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고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 때문에 도회는 문뜩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마해지고 정숙해지는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 때 집이란 집은 모두가 먼 꿈 속에 포근히 안기고 사람들 역시 희귀한 자연의 아들이 되어 모든 것은 일시에 원시 시대의 풍속을 탈환한 상태를 정(呈)한다.

 * 겨울의 서정시인 백설  

온 천하가 얼어붙어서 찬 돌과 같이도 딱딱한 겨울날의 한가운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은 아무 소리도 없이 한들한들 춤추며 내려오는 것인지, 비가 겨울이 되면 얼어서 눈으로 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만일에 이 삭연(索然)한 삼동이 불행히도 백설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의 적은 위안은 더욱이나 그 양을 줄이고야 말 것이니, 가령 우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추위를 참고 열고 싶지 않은 창을 가만히 밀고 밖을 한 번 내다보면, 이것이 무어랴, 백설 애애(白雪楙楙)한 세계가 눈앞에 전개되어 있을 때, 그때 우리가 마음에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말할 수 없는 환희 속에 우리가 느끼는 감상은 이 아름다운 밤을 헛되어 자버렸다는 것에 대한 후회의 정이요, 그래서 가령 우리는 어젯밤에 잘 적엔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서 최후의 단안을 내린 바 있었다 하더라도, 적설(積雪)을 조망하는 이 순간에만은 생(生)의 고요한 유열(愉悅)과 가슴의 가벼운 경악을 아울러 맛볼지니, 소리없이 온 눈이 소리없이 곧 가버리지 않고 마치 그것은 하늘이 내리어 주신 선물인거나 같이 순결하고 반가운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또 순화(純化)시켜 주기 위해서 아직도 얼마 사이까지는 남아 있어 준다는 것은, 흡사 우리의 애인이 우리를 가만히 몰래 습격함으로 의해서 우리의 경탄과 우리의 열락(悅樂)을 더 한층 고조하려는 그것과도 같다고나 할런지!  

 * 백설이 주는 위안  

우리의 온 밤을 해복스럽게 만들어 주기는 하나,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감미한 꿈과 같이 그렇게 민속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한 번 내린 눈은, 그러나 그다지 오랫동안은 남아 있어 주지는 않는다. 이 지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픈 일이나 얼마나 단명(短命)하며 또 얼마나 없어지기 쉬운가! 그것은 말하자면 기적같이 와서는 행복같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 백설의 단명함  

편연(便姸) 백설이 경쾌한 윤무(輪舞)를 가지고 공중에서 편편히 지상에 내려올 때, 이 순치(馴致)할 수 없는 고공(高空)무용이 원거리에 뻗친 과감한 분란(紛亂)은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처연한 심사를 가지게까지 하는데, 대체 이들 흰 생명들은 이렇게 수많이 모여선 어디로 가려는 것인고? 이는 자유의 도취 속에 부유(浮遊)함을 말함인가? 혹은 그는 우리의 참여하기 어려운 열락(悅樂)에 탐닉하고 잇음을 말함인가? 백설이여! 잠시 묻노니, 너는 지상의 누가 유혹했기에 이 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그리고 또 너는 공중에서 무질서의 쾌락을 배운 뒤에, 이 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여,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과연 뉘라서 너희의 무정부주이를 통제할 수 있으랴? 너희들은 우리들 사람까지를 너희의 혼란 속에 휩쓸어 넣을 작정인 줄을 알 수 없으되 그리고 또 사실상 그 속에 혹은 기꺼이, 혹은 할 수 없이 휩쓸려 들어가느 자도 많이 있으리라마는 그러나 사람이 과연 그러한 혼탁한 와중(渦中)에서 능히 결딜 수 있으리라고 너희는 생각하느냐?                                                                                 

* 강설의 아름다움  

백설의 이 같은 난무(亂舞)는 물론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강설(降雪)의 상태가 정지되면, 눈은 지상에 쌓여 실로 놀랄 만한 통일체를 현출(現出)시키는 것이니, 이와 같은 완전한 질서, 이와 같은 화려한 장식을 우리는 백설이 아니면 어디서 또다시 발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주위에는 또한 하나의 신성한 정밀(靜謐)이 진좌(鎭座)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을 엿듣도록 명령하는 것이니, 이 때 모든 사람은 긴장한 마음을 가지고 백설의 계시(啓示)에 깊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보라! 우리가 절망 속에서 기다리고 동경하던 계시는 참으로 여기 우리 앞에 와서 있지는 않는가? 어제까지도 침울한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이, 이제는 백설의 은총(恩寵)에 의하여 문뜩 빛나고 번쩍이고 약동하고 웃음치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붙은 풀 포기, 앙상한 나뭇가지들조차 풍만한 백화(百花)를 달고 있음을 물론이요, 괴벗은 전야(田野)는 성자의 영지(領地)가 되고, 공허한 정원은 아름다운 선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은 성화(聖化)되어 새롭고 정결하고 젊고 정숙한 가운데 소생되는데, 그 질서, 그 정밀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며 영원의 해조(諧調)에 대하여 말한다. 이 때 우리의 회의(懷疑)는 사라지고, 우리의 두 눈은 빛나며, 우리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느끼면서, 위에서 온 축복을 향해서 오직 감사와 찬탄을 노래할 뿐이다.

* 눈이 쌓인 세계의 아름다움

눈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덮어줌으로 의해서 하나같이 희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지만, 특히 그 중에도 눈에 덮인 공원, 눈에 안긴 성사(城舍), 눈 밑에 누운 무너진 고적(古蹟), 눈 속에 높이 선 동상(銅像) 등을 봄은 일단으로 더 흥취의 깊은 곳이 있으니, 그것은 모두가 우울한 옛 시를 읽은 것과도 같이, 그 눈이 내리는 배후에는 알 수 없는 신비가 숨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공원에는 아마도 늙을 줄을 모르는 흰 사람들이 떼를 지어 뛰어다닐지도 모르는 것이고, 저 성사(城舍) 안 심원(深園)에는 이상한 향기를 가진 알라바스터의 꽃이 한 송이 눈 속에 외로이 피어 있는 지도 알 수 없는 것이며, 저 동상(銅像)은 아마도 이 모든 비밀을 저 혼자 알게 되는 것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참된 눈은 도회에 속할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산중 깊이 천인 만장(千?萬丈)의 계곡에서 맹수를 잡는 자의 체험할 물건이 아니면 아니 된다. 생각하여 보라! 이 세상에 있는 눈으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니, 가령 열대의 뜨거운 태양에 쪼임을 받는 저 킬리만자로의 눈, 멀고 먼 옛날부터 아직껏 녹지 않고 안타르크리스에 잔존(殘存)해 있다는 눈, 우박과 알래스카의 고원에 보이는 적설(積雪), 또는 오자마자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다는 상부 이탈리아의 눈 등 .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눈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눈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 더욱 아름다운 눈의 세계  

그러나 불행히 우리의 눈에 대한 체험은 그저 단순히 눈 오는 밤에 서울 거리를 술집이나 몇 집 들어가며 배회하는 정도에 국한되는 것이니, 생각하면 사실 나의 백설부(白雪賦)란 것도 근거 없고 싱겁기가 짝이 없다 할밖에 없다.

* 도회에서의 눈에 대한 체험  

 

* 부(賦) : 감상을 적은 한시(漢詩)체의 한 가지

* 구각 : 낡은 껍질이란 뜻으로, 옛 제도, 관습 등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고착화된 틀을 의미한다.

* 정(呈)한다 : 어떤 모양, 빛깔 등을 말한다.

* 삭연(索然)한 : 외롭고 쓸쓸한

* 백설애애(白雪皚皚) : 눈이 내려 깨끗하고 흰 모양.

* 유열(愉悅) : 유쾌하고 기쁨.

* 민속(敏速) : 날쌔고 빠름.

* 변연(便娟) : 춤추는 모양. 가볍게 나는 모양.

* 윤무(輪舞) : 원무(圓舞). 원진(圓陣)을 이루어 추는 춤.

* 편편 : 가볍게 훨훨 나는 모양

* 순치(馴致) : 짐승을 길들임

* 분란(紛亂) : 어수선하고 야단스러움

* 처연(凄然) : 쓸쓸하고 구슬픈 모양

* 난무(亂舞) : 어지럽게 춤춤.

* 현출시키다 : 나타나게 하다

* 정밀(情謐) : 고요하고 편안함

* 진좌(鎭坐) : 자리잡아 앉음

* 啓示(계시) : ① 깨우쳐 보임. ②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가르쳐 알게 함.

* 괴벗은 : 발가벗은

* 성화(聖化) : 성스럽게 됨

* 해조(諧調) : 잘 조화됨

* 城舍(성사) : 성곽

* 심원(深園) : 깊숙하고 그윽한 정원

* 일라바스터(alabaster) : 설화석고(雪花石膏)

* 천인(千仞) : 천 길. 산이나 바다가 몹시 높거나 깊음.

* 만장(萬丈) : 만 발이나 되도록 몹시 길거나 높음

* 안타르크리스 : 남극을 뜻하는 듯. 독일어로 안타르크티스(Antarktis)인데, 잘못 표기된 듯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