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1948) -김동리-

채봉감별곡 - 작자 미상 -

<앞부분 줄거리>

평양성 밖 김 진사의 딸 채봉은 꽃구경을 나섰다가 전(前) 선천 부사의 아들 강필성을 만나 서로 호감을 갖는다. 필성은 채봉이 부끄러워 도망치다가 떨어뜨린 손수건(사랑의 매개체)에 연정을 담은 시를 써서 시비 추향에게 전하고, 채봉은 회답시를 보낸다. 채봉의 어머니 이 부인이 채봉을 질책하자 채봉이 사실을 고한다. 채봉의 아버지 김 진사는 딸의 혼약처를 구하고 자신의 벼슬길을 알아보러 한양에 갔는데 세도가 허 판서의 문객 김양주를 만난다. 그 사이 필성이 어머니를 통하여 채봉의 집에 매파를 보내자 채봉의 어머니는 채봉과 필성의 혼인을 허락한다.

[만산 낙엽은 쓸쓸한 가을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흩어지고 공산명월(사람이 없는 빈 산에 외로이 비치는 밝은 달)은 적막한데 서릿바람에 놀란 기러기는 공중에 높이 떠 구슬피 울며 긴 소리로 짝을 부르며 평양 을밀대(평양 금수산 마루 위에 있는 대와 그 위에 있는 누각) 앞 이 감사 집 후원 별당 위로 남쪽을 향해 날아가더라.](배경 묘사와 계절적 배경 제시, 가을의 쓸쓸한 풍경을 통해 분위기를 고조함.)

별당 건넛방에 팔짱을 끼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열여덟가량 되는 아름다운 처녀가 지붕 위로 날아가며 우는 기러기 소리(쓸쓸하고 애상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청각적 소재) 듣고 고개 들어 남창을 바라보니 쓸쓸한 가을바람과 함께 두둥실 높이 떠 있는 달님과도 같이 어떤 애수에 서린 양, 소저('아가씨'를 한문 투로 이르는 말. 채봉을 가리킴.)는 몸을 일으켜 안방에서 들리지 않도록 소리 안 나게 미닫이문을 열더라. 그와 함께 창틈으로 스며들기만 하던 달빛이 서늘한 가을바람과 함께 고운 소저의 얼굴을 뚜렷이 비춰 주니 열여덟의 고운 아가씨는 두둥실 높이 뜬 달을 쳐다보며,

"휘이 ……."

긴 한숨을 내쉬며, 말하되,

"문 닫은 창 앞의 달이라더니 나는 가위(한마디로, 이르자면, 그런 뜻에서) 열어 놓은 문으로 들어온 달을 창가에서 바라보누나!"
하며 사방의 가을 경치를 살피더니,

"오늘이 적당한 때라 하겠노라."
하고 마음에 있는 말을 글로 적어 볼까 하노라.

벼루를 내어 먹을 갈고 그 먹에 붓을 찍어 백농화지를 펼쳐 책상 위에 놓고는 섬섬옥수로 붓대를 법도 있게 잡고는 추풍감별곡(훗날 두 주인공을 다시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됨.)을 짓더라.

이 고운 아가씨는 누구인가 하면 이 처녀는 평양부중에 사는 김 진사의 딸로서 이름은 채봉이라 하더라.(등장 인물(주인공)의 직접 제시)

<중략 줄거리> 김 진사 내외는 오래도록 자식이 없어 적적하게 지내다가, 뒤늦게 채봉을 얻게 되고 금지옥엽으로 기른다.(주인공의 출생 내력부터 설명하는 일반적인 고전소설과는 달리, 주인공의 현재 상태를 제시한 후 출생 내력을 설명함. - 고전소설 구성상의 전형성 탈피) 채봉이 자라 시집갈 나이가 되지만 평양에 적당한 배필이 없자 김 진사는 채봉의 배필을 찾아 서울로 올라간다.

김 진사 내외는 채봉을 보배로 기르며 좋은 짝을 맞춰 주고자 사방으로 두루 사윗감을 구했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 채봉의 나이 어느덧 열여섯이 되니, 추향을 데리고 동산으로 올라가 봄빛을 즐겼다.

그때 서편에서 사람의 기척이 있기로 깜짝 놀란 두 처녀가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백옥과 같고 풍채는 두목지 같은 십팔 세 가량의 소년(남자 주인공 강필성,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인물 묘사)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채봉은 그 소년을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으나 얼굴이 붉어지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급한 걸음으로 초당으로 들어가 동산으로 나 있는 문을 닫는다.

소년이 터진 담으로 들어와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건(채봉과 강필성의 만남을 이어주는 매개체)을 주워 들고 펼쳐 보니 채봉이라는 두 글자가 수놓아 있다.

소년이 담 터진 곳으로 나와서 담 안의 동정을 살피는데 조금 전 앞장서 들어가 문을 걸던 처녀(채봉의 시비인 추향)가 나와서 땅바닥을 두루 살핀다.

"이상하다. 지금 떨어뜨린 수건이 어디로 갔담?"

"내 손에 들어온 수건인데 찾을 수 있나?"

추향이 귓결에 말을 들었다.

"서방님, 수건을 얻은 듯하니 내어 주시면 감사만만이겠습니다"

"수건은 누구의 것이냐?"

"우리 댁 소저의 것입니다."

"너희 댁 소저의 이름은 무엇이라 부르느냐?"

"채봉이라 합니다. 이제 수건을 주시지요."

"수건을 주기는 주겠다만은 너 여기서 잠깐 기다려라. 내가 다녀올 데가 있다.(채봉에게 보낼 시를 쓰기 위함.)"

소년은 아랫집으로 들어가 수건에 절구를 써 가지고 나와 추향에게 건네주며 말한다.

"나는 동대문에 사는 강필성인데, 홀어머니 시하에서 지금껏 장가를 들지 못해 근심하는 사람(강필성의 불우한 처지 - 채봉과 필성의 사랑이 순탄치 못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함.)이라고 소저께 말씀 드려라. 이 수건을 보시면 반드시 답장이 있을 것이니 회답을 전해 다오. 내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노라."

<중략 줄거리> 필성이 보낸 시에 채봉이 화답시를 보내면서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때 채봉의 모친 이씨가 월색이 명랑함을 보고 산보 삼아 초당(집의 원채에서 떨어진 곳에 진 조그마한 집채)으로 나오니 채봉과 추향이 없어 괴이히 여겨 후원으로 찾아오는데, 바람을 따라 남자의 음성이 들리는지라 대경하여 몸을 감추고 엿보니 채봉이가 추향을 데리고 필성과 수작하는 말이 귀에 역력히 들리는지라.

어찌 된 일인지 몰라 나가지는 아니하고 눈을 부비며 필성을 보니 백옥 같은 풍채 월하(달 아래)에 채봉과 같이 서 있는 형상이 가위 원앙의 쌍이라, 수작하는 이야기만 듣다가 추향이 필성과 작별하고 초당으로 채봉과 같이 옴을 보고 급히 초당 마루로 앞서서 올라가 앉으니 채봉과 추향이가 오거늘 이 부인이 모른 체하고 묻는다.

"아가, 어디를 갔다 이렇게 늦게 오느냐?"

채봉은 자연 마음에 부끄러운 태도가 있어 미처 대답을 못 하고 추향이 대답한다.

"달이 하도 밝기에 후원에서 놀다가 인제야 옵니다."

"어린아이들이 무섭지도 아니하냐? 근일 들은즉 후원 터진 데 사람의 발자취가 있더라고 하던데 다시는 밤중에 들어가지 말라. 그러나 지금 들은즉 남자의 소리가 들리니 누가 들어왔더냐?"

채봉은 천만 뜻밖에 이 말을 듣고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추향은 창황하여(놀라거나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즉시 대답을 못 한다.

이 부인이 이 거동을 보고 노기를 띠고 재차 다시 묻는다.

"왜 대답이 없느냐? 나는 남자와 같이 말하는 것을 보고 어떤 남자가 들어온 것을 책하여 내보내는 줄 알았더니 지금 너희의 동정을 보니 무슨 사정이 있구나. 이 일을 진사 아시기 전에 진작 실토하면 내가 먼저 조처를 하고 진사께 말씀하려니와, 만일 기망(남을 속여 넘김)을 하면 진사께 말씀하여 살풍경(살기를 띤 광경)이 일 것이니 이실직고(사실 그대로 고하여)하여 기망 말라. 추향아, 너는 사정을 자세히 알지? 만약 네가 기망하면 너부터 치죄하리라(허물을 가려 벌을 주다)."

채봉은 더욱 망지소조하여(너무 당황하거나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추향은 속으로 생각하되, '바로 말씀 드려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이 부인 앞에 가 앉으며,

"마님께서 이같이 하문하시니 어찌 기망하오리까? 이는 다 소비의 죄이오니 만사무석(萬死無惜,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음)이올시다."

"그래. 네가 주선한 것이면 사정이 어찌 되었단 말이냐?"

추향이 처음에 채봉과 후원에 꽃구경 갔더니 담 밖에서 남자의 음성이 들리기로 급히 초당으로 왔다가 수건을 잃어 찾으러 나갔더니 수건이 천만의외에 강필성에게 간 말이며, 글귀로 화답한 말이며,(필성과 채봉이 만나게 된 사연을 요약적으로 제시함.) 일장설화를 다하고 필성을 입에 침 없이 칭찬한다.

"강 상공(강필성)을 뵌즉 가위 여옥기인(如玉其人, 사람됨이 뛰어나 옥과 같음)이라. 소저의 배우(배우자) 되기 부끄럽지 아니하더이다."

이 부인이 이 말을 다 듣고 한참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더니,

"이 일을 진사께서 아시면 큰일 나겠다. 어떻게 처치를 해야 무사히 된단 말이냐?"

"무사히 처치하려면 어려울 것 없지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추향이 부인 귀에 입을 대고 한참을 소곤소곤하더니(추향이 필성과 채봉의 혼인을 권유함)

"그렇게 하면 이런 사정을 누가 알며 일은 좀 잘 되겠습니까?"

"네 말도 그럴듯하다마는 강씨의 문벌이 어떠하다더냐?"

"청해서 물으시면 아시려니와 강 선천(선천 부사, 선천은 지명임) 자제이고, 외가댁은 앞집 김 첨사 댁이라고 하시니 댁과 상당치(어느 정도 가깝거나 알맞지) 아니하십니까?"

"혼인이라 하는 것은 인력으로 못 하는 것이라. 약비기연(若非其緣)이면 비록 일실지내(一室之內)에 있어도 초월지간(楚越之間)과 같고 필유기연(必有其緣)이면 수만 리 밖에 각각 있어도 자연 모되나니(만약 그와 같은 인연이 아니면 같은 방에 있어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떨어져 있는 것과 같고, 반드시 될 인연이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맺어진다는 말) 어찌 인력으로 억제하리오.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네 말과 같이 주선하려니와 대관절 강씨의 글씨가 어디 있느냐?"

추향이 의장(옷장)을 열고 수건을 내놓으니 이 부인도 문한(文翰)이 유여(有餘)한지라(문필에 관한 일을 알아보는 여유가 있는지라) 필성의 글씨를 보더니 절절 칭찬하며 채봉을 돌아보고,

"아가, 네 마음을 내가 인제야 짐작하였으니 다시 더 말할 것 없거니와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이 있다. 네 부친께서 혼사로 인연하여 서울로 올라가셨는데, 만일 혼인을 정하고 내려오시면 어찌한단 말이냐?"

추향이가 깔깔 웃으며,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아무리 정하고 내려오실지라도 예단을 받으셨습니까? 파의하기(하려고 마음먹었던 뜻을 버리기)가 무엇이 어려워서 염려를 하십니까?"

"이제 와서 어찌하겠느냐? 비록 채단(혼인 때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미리 보내는 푸른색과 붉은 색의 비단)을 받았어도 파의를 할 수밖에 없지."
하며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한편, 필성은 채봉과 은근히 백 년을 살자 맹세하고 집으로 돌아와 모친 최씨를 뵙고,

"어머님, 옛글에 국난(國難)에 사충신(思忠臣)이요, 가빈(家貧)에 사현처(思賢妻)라(나라가 어려울 때는 충신을 생각하고, 집이 가난하면 현명한 처를 생각함) 하는 말이 있지 아니합니까? 지금 소자의 나이 열여덟을 당해서도 모친을 봉양할 처속이 없고 가세는 점점 탕패하니(탕진하니) 어찌 민망치 않겠습니까? 들은즉 김 진사 집 규수가 현숙하다 하니 매파를 보내시어 통혼을 하여 보시옵소서."

"네 나이 지금 십팔 세라 그런 생각이 없겠냐만은, 김 진사 집과 우리 문벌은 상당하지마는 빈부가 판이하니 즐겨 우리와 결친코자(사돈 관계를 맺고자) 하겠느냐?"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통혼이야 못 할 것 있습니까?"

"통혼은 해 보겠다만은 들을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하고 매파를 김 진사 집으로 보내 통혼을 하니, 이때 이 부인이 혼자 앉아서 혼사로 궁리를 무수히 하는데 밖에서 매파가 들어오며 인사를 한다.

"마님, 안녕하십니까?"

"어, 중매 할멈 오는가. 근일에 볼 수 없더니 아마 재미가 많은 게지?"

"재미가 다 무엇입니까? 요새 같아서는 목구멍에 거미줄 치기가 알맞습니다."

"그러해서 쓰겠나. 하도 아니 오기에 나는 재미를 보느라 그렇게 아니 오나 하였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는가?"

"참한 신랑이 하나 있어서 왔습니다."

"어떠한 신랑이란 말인가?"

"대동문 밖 강 선천 아드님인데 인물은 반악(중국 서진 때의 시인 겸 문인) 같고 풍채는 두목지(중국 당나라 말기의 시인) 같고 문장은 이태백 같고 필법은 왕우군(진나라 서예가 왕희지) 같사오니 가위 댁 소저의 배필이라 중매로 수삼 년을 돌아다니되 평생에 처음 보는 짝이기에 말씀드리니, 진진지호(秦晉之好, 혼인을 맺은 두 집 사이의 가까운 정)를 맺으시면 두 댁이 중매의 생각이 날 듯 합니다."

"나도 일찍이 신랑이 출중하단 말을 들었거니와 내가 한번 친히 보고자 하니 어느 하루 내 집으로 데리고 오게."

"그리하십시오. 내일 신랑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중략 줄거리> 한편 서울에 간 김 진사는 세도가 허 판서의 힘을 빌어 벼슬을 얻어 보고자 한다.

잠시 후 미소년이 연적을 갖다 놓고 돌아가거늘, 김 진사 넋을 잃고 미소년 가는 데를 바라본다. 이 미소년은 허 판서의 시중을 드는 아이인데, 허 판서는 세상 남녀 간에 이 미소년만 한 인물이 없다고 늘 칭찬하는 터이다. 그런데 허 판서는 김 진사의 말을 듣고 별안간 딴 욕심이 생기니, 오백여 리 밖에 있는 채봉의 앞날에 무수한 고난이 이로부터 비롯된다.(김 진사는 자신의 딸 채봉을 허 판서의 애첩으로 들여보내고 그 대가로 벼슬할 생각을 함.) 김양주가 먹을 다 갈고 김 진사를 탁 치며,

"무엇을 그렇게 정신없이 보고 있소. 어서 어음이나 써서 드리고 갑시다."

"예, 쓰지요. 그런데 오천 냥은 지금 있고, 오천 냥은 평양으로 기별을 해서 가져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려가야 할 터인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허 판서는 벼슬 팔기에 수단이 있는 양반일 뿐 아니라 김 진사 집의 실정을 다 아는 터라 이 말을 듣고 선뜻 허락을 한다.

"그러면 오천 냥 가진 표는 나를 주고, 오천 냥은 어음만 써 놓았다가 나중에 들여놓게그려."

김 진사는 오천 냥 어음을 써 놓고, 또 오천 냥은 돈표를 써 놓으니, 허 판서가 받아 문갑 서랍에 넣고 웃는 낯으로 김 진사를 쳐다본다.

"내일이면 과천 현감을 할 터이니, 이제는 김 과천이라 하지. 김 과천, 허허!"

"황송합니다."

"내일이면 할 터인데 무슨 관계가 있나. 그런데 아까 우리 집 심부름하는 아이를 보고 무어라고 했나?"

"위인이 하도 얌전하기에 칭찬하였습니다."

"글쎄, 칭찬한 줄은 아네. 그런데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고 그러지 않았나?"

허 판서는 음흉한 생각이 있어서 묻는 말이지만 김 진사가 어찌 그런 속을 알겠는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황공하여 대답한다.

"네, 그러했습니다. 소인에게 미천한 딸이 하나 있사온데, 과히 모자라지는 아니하므로 그에 걸맞은 사람으로 짝을 지어 주려고 열여섯이 되도록 시집을 못 보냈습니다. 댁 상노(밥상을 나르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어린아이)를 보니 그 모양이 비슷하기에 무심코 속으로 말한다는 것이 대감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습니다."

허 판서가 이 말을 듣고 불같은 욕심이 일어나서 체면도 돌아보지 않고,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여보게 김 과천, 나는 그 상노 놈과 비교해서 어떤가?"

"황송합니다."

"황송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김 과천에게 청할 말이 있으니, 부담 없이 들을 텐가?"

"대감의 분부라면 죽더라도 따르겠사오니, 어찌 안 듣겠습니까?"

"다른 청이 아니라, 내가 자네 사위가 되면 어떻겠는가?"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천만의 말이 아니라 내 말을 들어 보게. 김양주가 이 자리에 앉아 있어서 하는 말이네만 김양주는 내 속을 다 아네. 내가 작년에 첩을 잃고,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그저 있네. 자네 딸을 내게 줄 것 같으면, 자네 딸도 호강을 할 것이요, 자네도 작은 고을 수령으로만 다니겠나. 감사, 아니 참판, 판서는 못 할라구."(첩을 밝히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욕스러운 허 판서)

애초에 김 진사가 서울에 왔을 때에는 천금 같은 딸을 위해 좋은 사위를 얻어 낙을 보려는 마음이 먼저였다. 그런데 평안도 사람이 벼슬하기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려운 이 시절에, 천만뜻밖으로 줄을 잘 잡 벼슬자리를 얻고, 또 이같이 허 판서의 농간에 놀아나다 보니 헛된 영예에 불같은 욕심이 나는지라.(당시 부패한 관리들의 추악한 이면을 엿볼 수 있는 구절임.) 혼자 생각하길,

'채봉의 됨됨이가 녹록지 아니하여(만만하고 상대하기 쉽지 않아) 팔자가 세니 재상의 첩이나 시켜 호강하게 하고, 나는 부원군 부럽지 않게 벼슬이나 실컷 얻으리라.' / 하고 기쁘게 허락한다.

"미천한 딸년을 더럽다 아니하시고 이같이 거두어 주시니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마는, 미천한 것이 제대로 감당할는지 그것을 몰라 염려올시다."

"허허, 별소리를 다 하네그려. 내가 이야기를 들은즉 평양 사람들이 남녀 간에 일찍 성숙한다고 하던데. 그래, 어느 날 떠나려나?"

"내일 내려가서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러면 빨리 데리고 올라 오게. 그동안 나는 자네 일을 잘 주선하여 줄 터이니……."

김 진사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다음 날 허 판서에게 하직하고 평양으로 내려 간다.

이때 이 부인은 채봉의 혼인을 정하고 김 진사가 내려올 동안에 혼수를 장만하려고 방에서 채봉의 의복을 마련하고 앉았는데, 김 진사가 내려와 집 안에 들어서며,

"부인, 어디 갔소?" / 하고 마루에 털썩 앉으니, 이 부인이 그 목소리를 듣고 기다렸던 차에 반가워서, 손에 잡았던 가위를 집어 던지고 급히 뛰어나온다.

"진사님이오! 왜 이렇게 더디 내려오셨소. 나는 그간 애기 혼인을 정하고 내려오시기만 고대했지요."

김 진사가 혼인 정했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혼인을 정했다니, 누구와 정했단 말이오?"

"오시느라 피곤하시지요. 차차 이야기할 것이니 우선 방으로 들어와 앉으시지요."

"아니, 괜찮소. 우선 급하니 말을 하구려. 그런데 이제 나는 진사가 아니라 그새 참봉이 됐다오. 허허." / 하며 방에 들어와 갓과 탕건을 벗어 부인에게 주니 부인이 받아 벽에 걸고, 반겨하며 옆에 앉는다.

"아이고 반가워라. 올해는 운수가 겹겹이 좋구려. 영감은 벼슬을 하시고, 채봉이는 혼인을 정하고 ……. 그런데 혼인 정했단 말을 듣고 왜 그리 깜짝 놀라시오?"

"우선 듣기가 급하니 말부터 하오."

"그런 것이 아니라 대동문 밖에 사는 장 선천 부사의 아들과 정혼하였다오."

"아니, 장 선천 부사 아들과 정혼했어? 그 거지 다 된 것하고? 흥, 내 참 기가 막혀서 ……. 서울에서 기막히 사위를 정하고 내려왔으니, 채봉이를 데리고 우리 서울로 올라가서 삽시다."(물질을 중시하고 자신의 이익과 권셀ㄹ 위해서 딸의 사랑을 짓밟으려 하는 김 진사)

부인이 이 소리를 듣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기막힌 사위라니 어떤 사람이란 말이오?" / 하고 물으니, 김 진사 혀를 휘휘 내두르며 허풍을 떤다.

"누군지 알면 뒤로 자빠질 것이오. 누구인고 하니, 사직골 허 판서 댁이오. 세도가 이 나라에서 제일이지."

부인이 이 말을 듣고 한편으론 끔찍하고 한편으로는 기가 막혀서 다시 묻는다.

"허 판서면 첫째 부인이요 둘째 부인이요?"

"첫째 부인도, 둘째 부인도 아니오. 첩이라오."

"나는 못 하겠소. 허 판서 아니라 허 정승이라도 ……."

"왜 못 해!"

"서울 가시더니 정신이 돌아 버렸구려 예전에는 얌전한 신랑을 택해 슬하에 두고 걱정 근심 없이 재미있게 살자고 늘 말씀하시더니 오늘은 이게 무슨 날벼락이오. 그래. 채봉이 그것을 금이야 옥이야 길러서 남의 첩으로 준단 말이오."

"허허, 아무리 남의 첩이 되더라도 호강하고 몸 편하면 됐지."(김 진사의 물질주의적 가치관)

"첩이란 것이 남의 눈에 가시 되는 것이 아니오? 언제 무슨 해를 당할는지 모르니 비단 방석에 앉아도 바늘방석 같을 텐데, 호강만 하면 제일이란 말이오. 나는 죽어도 그런 호강 아니 시키겠소."

김 진사 이 말을 듣고 열이 나서 무릎을 탁 치며 큰 소리를 친다.(김 진사의 권위적이고 급한 성격이 드러남)

"그래, 그런 자리가 싫어? 저런 복 찰 사람을 보았나. 딴소리 말고 내 말 좀 들어 보오. 우선 춤 출 일(허 판서를 통해 벼슬을 얻게 될 일)이 있으니 ……."

"무엇이 그리 좋은 일이 있어 춤을 춘단 말이오?"

"벼슬 없이 늙던 내가 허 판서의 주선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됐지, 도 내일 모레면 과천 현감을 하지. 이제 채봉이가 그리 들어가 살면 평생 호강하거니와, 내가 감사도 되고 참판도 되고 판서도 될 것인즉, 부인이야 정경 부인은 따 놓은 당상이니 이런 경사가 어디 있소. 두말 말고 데리고 올라갑시다."(김 진사가 채봉을 허 판서의 첩으로 보내려는 이유)

첩이란 말에 펄펄 뛰던 이 부인도 그 말에 솔깃하여,(변덕이 심하고 단순한 채봉의 어머니)

"영감이 기어코 하려 드시면 난들 어찌하겠소마는, 채봉이가 말을 들을지 모르겠소."

이때 초당에 앉아 글을 읽고 있던 채봉은 부친의 목소리를 듣고 추향을 데리고 안방으로 건너오다가 자신의 혼사 이야기가 나오자 걸음을 멈추고 서서 듣고 있었다. 이윽고 마소리가 그치자 채봉이 방에 들어가 부친 앞에서 날아갈 듯 맵시있게 절을 한다.

"아버님, 먼 길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김 진사가 딸을 보고 귀한 생각이 한층 더 나서 등을 어루만지며,

"오냐, 잘 있었느냐. 그래 그동안 글공부도 더 하고, 바느질도 많이 익혔느냐?" / 하더니, 부인을 쳐다보고 벙글벙글 웃으며,

"부인, 참 이제는 바느질을 배워도 쓸 데가 없겠구려. 침모가 있어서 다 해서 바칠 터이니 ……."

채봉이 이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숙인다. 김 진사가 다시 채봉을 보고,

"아가, 너는 재상의 첩이 좋으냐, 여염집의 부인이 좋으냐? 아비, 어미 있는데 부끄러울 게 뭐냐. 네 생각을 말해 보아라."

채봉이 예사 여염집 처녀 같았으면 부모의 말이라 뭐라고 대꾸하지 않았을 처이지만, 장필성과의 일을 잠시도 잊지 않은 데다 부모가 하는 얘기를 다 들은 터라 조금도 서슴지 않고 얼굴을 바로 하고 대답한다.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뒤 되기는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사리가 분명하고 자신의 의견을 서슴없이 전달할 줄 아는 주체적인 채봉의 모습)

"허허, 그 녀석. 네가 첩 구경을 못 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재상의 첩이야 세상에 그 같은 호강이 또 없느니라."

부인이 말을 가로막고 김 진사를 쳐다보며,

"영감은 자식에게 별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계집애 자식이란 것은 으레 부모가 하는 대로 좇아가는 법이랍니다. 아가! 너는 네 방으로 가 있어라."

채봉을 내보낸 두 내외는 서울 올라갈 의논을 하고 그날로 집안 세간을 팔아 서울 갈 짐을 꾸린다.

한편 채봉은 초당으로 나와 장필성과의 약속을 생각하고 홀로 탄식한다.

'어지러운 이 세상에 부귀공명이 무엇인가. 그같이 나를 사랑하던 부모가 하루 아침에 믿음을 저버리고 나더러 천한 첩의 몸이 되라 하시니, 가엾고 한심한 일이로구나. 부모는 부귀에 눈이 어두워 그런다지만, 나는 한번 약속한 마음 변치않으리라. 잠깐 동안 부모에게 근심을 끼칠지라도 믿음을 저버리지는 않겠다.(지조와 신의, 사랑을 중시 여기는 채봉)'

채봉이 이 같이 비장한 마음을 먹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부운 같은 이 세상에 부귀공명이 무엇인고. 그와 같이 나를 사랑하던 우리 부모가 일조에 나로 하여금 신의를 배반하고 천첩의 몸이 되게 하려 하니 가엾고 한심한 일이로구나. 부모는 부귀에 눈이 어두워 그러하거니와, 나는 여자의 몸이 되어 한 번 허락한 마음을 변하지 아니하여 잠깐 동안 부모의 근심을 끼칠지라도, 내 몸이나 불의지죄(不義之罪)를 면하리라."(주관이 뚜렷하고 사리 판단이 바른 채봉을 통하여 주체적인 여성상이 제시되는 부분)
하는데,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이어 한 꾀를 생각하고 추향을 대하여,

"이애, 추향아! 내가 너를 몇 해 동안 친형제같이 알고 지낸 터이어니와, 내 억울한 사정을 알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장씨의 일은 너도 아는 바이어니와, 아무리 부모의 분부인들 그런 중한 언약을 오늘날 배반할 수 있나.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글쎄올시다. 당초에 서울서 정혼을 하고 오시더라도 퇴혼을 하겠다고 말씀하시던 마님께서 마음이 변하였으니, 아마 소저는 서울 만나님이 꼭 되는 길밖에 없을까 하외다. 그러나 올라가시면 그만이지마는, 나는 이 바닥에 살며 장씨를 무슨 낯으로 봅니까?"

채봉이 이 말을 듣더니,

"이애, 그러지 않을 도리가 있다."
하고 추향의 귀에 입을 대고 무슨 비밀한 말을 하고 다시 말을 이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할 수밖에 없으니, 가다가 중로에서 몸을 피할 터이니 너는 어멈하고 뒤를 밟고 오너라."

"그러시면 진사님과 마님께서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소저 생각이 그러하시면 시키는 대로 하지요."

<중략 부분 줄거리> 채봉이 허 판서의 첩이 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던 김 진사 일행은 도중에 도적을 만나 전 재산을 빼앗기고 채봉은 부모 몰래 평양으로 되돌아온다.

허 판서(탐욕스럽고 부패한 인물)는 김 진사를 보고 크게 반겨하며,

"아, 김 현감(허 판서는 채봉의 아버지에게 과천 현감 자리를 매매하기로 했음) 오시나? 그래, 올라오시느라 노독이나 나지 않았는가? 자, 우선 급한 대로 과천 현감 칙지(채봉과 김 진사의 갈등의 매개)를 구경하려나?"
하더니, 문갑에서 칙지(임금이 내린 명령이 쓰인 문서)를 꺼내 준다.

김 진사는 칙지를 보고 가슴이 무너지며 혼 빠진 사람처럼 앉아서 눈물만 흘리고 감히 받지를 못한다.

허 판서는 이 모양을 보고 껄껄 웃으며,

"왜 그래, 응? 너무 반가워서 그러나?"

김 진사는 일어나 절하고 칙지를 받아 앞에 놓고,

"대감 혜택으로 천은을 입었습니다만 소인은 운수가 불길해서 올라오다가 죽을 풍파를 겪고 올라왔으나 대감 뵈올 낯이 없사옵니다."

허 판서가 깜짝 놀라며,

"그게 무슨 소린가? 풍파를 겪다니?"

김 진사가 전후 사실을 다 이야기하니, 허 판서는 별안간 눈이 샐쭉해지며 조금도 가엾이 여기는 기색이 없이(몰인정하고 이해 관계에만 밝은 허 판서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음.)

'허어, 이런 맹랑한 놈 보게. 제가 어쨌든 현감은 할 테니까 내려갈 때는 허락을 다 하고 지금은 다른 소리를 하는구나.'
하며 일부러 더욱 놀라는 체하며,

"대단히 놀라운 말일세그려. 그러면 재물은 도둑이 가져갔거니와 딸도 못 찾아 가지고 왔단 말인가?"(김 진사의 말을 의심하고 사건의 결과에 대해 확인함. 관심의 초점이 재물과 채봉에 있음을 알 수 있음.)

"아무리 찾았지만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대감 위력이나 빌어 찾어볼까 하고 이렇게 올라 왔사옵니다."(무능하고 의존적인 김 진사의 성격이 짐작됨.)

이 말을 들은 허 판서는 별안간 얼굴빛이 변하며,

"이놈, 소위 부모가 되어서 난중에 자식을 잃고 자식을 찾을 생각을 안 하고 뉘 위력을 빌려 찾으려고 내 버리고 왔다고! 맹랑한 놈."

<중략 줄거리> 허 판서는 김 진사를 옥에 가두고, 이씨 부인은 잔금 오천 냥을 가지고 오든지 채봉을 데리고 오든지 하라는 허 판서의 말을 듣고 평양으로 다시 돌아온다. 추향의 집에서 딸을 만난 이씨 부인은 모든 사실을 채봉에게 이야기하고 허 판서의 첩으로 가자고 한다. 그러나 채봉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첩이 되는 대신 기생으로 몸을 팔기로 작정한다.

"어서 오시오, 봉선 어머니. 추향 어미를 보낸 것은 내가 기생이 되려고 함인데 어떠시오?"

"좋기는 하지만 정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대강은 들었는데 돈은 얼마나 쓰려고?"

채봉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육천 냥만 주시오."

"그러면 오늘로 줄까?"

"오늘 주시오."

봉선 어미는 혼자 껄껄 웃으며,

"봉선이가 가고 채봉이가 오니, 봉하고는 대단한 인연이 있는 모양이로군."(언어유희-봉선 어미가 봉선을 팔고 나서 기생을 하나 사지 못하여 아쉬워하다가 채봉을 만났기에 하는 말임.)
하며, 집으로 돌아가 육천 냥을 가지고 와서 이씨 부인의 표를 받아간다.

이씨 부인은 하도 어이가 없어 속으로,

'저런 복처리년(채봉을 의미함. '복처리'란 복을 타고나지 못하여 만사에 실패하는 사람을 뜻함)이 어디 있나. 난 모르겠다. 나중에 개를 베고 죽든지.'(허 판서의 첩이 되지 않고 기생이 되려 하는 채봉을 괘씸하게 여기고 있음.)
하면서도 모녀의 정이라 채봉의 손을 잡고,

"아가, 네가 정말 이렇게 마음을 먹느냐? 평양 강씨(강필성)를 지키겠다 하더니 오늘 너를 보니 어디 강씨를 지키는 것 같으냐?"(채봉이 첩 자리를 마다 하고 기생이 되기로 한 것을 괘씸하게 생각하며 조롱어린 말을 함.)

"어머니는 제 생각 마시고 서울 가셔서 아버님이나 나오시게 하십시오. 저는 만리교에서 불에 타 죽었다고 하십시오."
하면서, 돈 오천오백 냥을 부인에게 주면서,

"오천 냥은 아버님 나오시게 하고, 오백 냥은 아버님 나오시면 노자해 가지고 오시도록 하십시오. 오백 냥은 제가 써야겠나이다."

이씨 부인은 일이 이쯤 되었으므로 우선 김 진사나 구해 내고 차차 조처하리라 마음먹고 눈물을 흘리면서 서울로 올라와 오천 냥을 들여놓고 김 진사를 내줍소서 했다.

허 판서는 오천 냥을 받으며 과천 현감은 파격을 시키고 또 트집을 잡기는 무단히 양반을 속였으니 딸마저 데려오지 않으면 내놓지 않겠다고 했다.(허 판서의 횡포-당대 지배층의 횡포를 반영함.)

이씨 부인은 기가 막혀 속으로 생각하기를 평양으로 내려가 채봉에게 이런 말을 해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니 죽으나 사나 여기서 끝장을 보리라 하고 남의 집 방을 얻어 놓고 바느질품을 팔아서 김 진사의 옥중 뒷바라지를 했다.

한편, 때는 9월 보름 달빛은 은은하게 창을 비추고, 공중에 외기러기는 끼룩끼룩 울면서 짝을 찾아 날아가고, 동산 소나무 가지 위에 두견새 슬피 우니, 무심한 사람도 마음이 허전해지는 이런 밤에, 임 그리며 독수공방하는 마음이야 오죽할까. 송이(채봉)는 모든 괴로움을 잊어 버리려고 책상머리에 고개를 묻고 잠깐 졸다가 기러기 소리에 놀라 눈을 뜨니, 남창에 비치는 달빛은 방 안에 가득하고, 쓸쓸히 지는 낙엽 소리는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사랑하는 임 생각을 떨치려 해도 그리움은 가슴 가득 차올라 눈물로 솟아난다. 송이가 창을 가만히 열고 달빛을 쳐다보며 탄식한다.

"달아, 너는 내 마음을 알리라. 작년 이맘때 뒷동산 밝은 달 아래 우리 임을 만났더니, 너는 다시 보건만 임은 어찌 못 보는가. 심양강의 거문고 타던 여인은 만고문장 백낙천을 달 아래 만날 적에 마음속에 있는 한없는 사연을 세세히 다 말하였건만 나는 임을 곁에 두지 못해 말할 데가 없구나. 이 사무치는 그리움을 종이 위에 쓰리라."

벼루를 꺼내고 먹을 갈고, 질 좋은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 비단결 같은 종이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섬섬옥수로 붓대를 곱게 쥐고, 긴 한숨 짧은 탄식에 맥없이 앉았다가, 고개 들어 가을밤 밝은 달을 두세 번 우러러보더니, 서두에 '추풍감별곡' 다섯 자를 쓴다. 애절한 사랑이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이 사무쳐 노래가 되고, 노래가 글이 되어 붓끝을 따라오니, 붓대가 쉴 새 없이 내려가 가슴을 저미는 사랑의 노래를 읊는다.

<중략> : 추풍감별곡(가사) → 장필성과 백년가약을 맺었다가 평양 기생이 된 채봉이, 장필성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정을 담아 읊은 내용으로 4박자씩 읊어 나간다.

송이가 이렇게 절절한 마음 써 내린 후에 붓대를 던지고 망연자실 앉았으니, 하늘이 비록 눈이 없어 보지는 못해도 어찌 그 애절함을 모르리오. 달이 벌써 중천에 떠올라 밤은 깊어가고, 기러기 우는 소리만 정적을 깨뜨린다. 아득한 정신은 기러기 소리 따라 멀어지고, 울다 지친 송이는 책상머리에 엎드려 다시 깜박 잠이 든다.

생각이 깊으면 꿈이 되는 법이다. 꿈속에서 송이는 장주의 나비같이 두 날개를 펼치고 바람을 따라 하늘에 떠다니며 사면을 살피는데, 자나깨나 잊지 못하던 장필성이 쓸쓸히 빈방에 앉아 전날의 답장을 내놓고 울고 있거늘, 송이가 들어가 마주 붙들고 울다가 우는 소리가 잠꼬대가 되어 아주 내쳐 운다.

사람이 늙어지면 잠이 없는 법이다. 이때 이 감사는 나이가 여든일 뿐 아니라, 한 지방의 수령이 되어 밤이나 낮이나 어떻게 하면 백성의 원성이 없을가, 어떻게 하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웠는데 갑자기 송이의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니, 깜짝 놀라 속으로 짐작하길,

'지금 송이의 나이 열여덟이니 분명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하고 가만히 송이의 방에 들어간다. 창은 열려 있고 송이는 책상머리에 엎드려 누웠는데, 불 켜진 책상 위에 종이가 펼쳐져 있다. 종이를 집어 보니 '추풍감별곡' 다섯 자가 눈에 들어온다. 대강 보고 손으로 송이를 흔들어 깨우니, 송이가 깜짝 놀라 눈을 뜬다. 송이는 눈앞에 서 있는 감사를 보고 어찌할 줄 몰라 급히 일어서는데, 이 감사가 종이를 말아 들고,

"송이야, 놀라지 마라. 비록 위아래가 있으나 내가 너를 친딸이나 다름없이 아끼니, 무슨 사정이 있거든 나에게 말을 해라. 마음속에 맺힌 것이 있으면 다 말하여라. 나는 너를 딸같이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아비같이 생각지 않고, 무슨 괴로움이 있어 말 아니하고 이러고 있는단 말이냐."

송이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겨우 입을 열어,

"소녀의 죄가 큽니다."

이 감사가 허허 웃고,

"너의 사정을 듣고자 하는 것이니, 마음에 있는 대로 다 말하여라."

송이는 어쩔 줄을 몰라 식은땀이 나고 몸이 떨려 말을 못하고 섰는데, 감사가 또 말을 재촉한다.

"이처럼 물어보시니 어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눈물을 닦고 몸을 추슬러 단정히 한 다음, 처음 후원에서 장필성과 글을 주고 받았던 일에서부터 모친이 장필성을 불러 혼약한 일을 말한 뒤, 김 진사가 서울로 올라가서 벼슬을 구하려고 허 판서와 관계한 일이며, 허 판서의 첩 자리를 마다하고 장필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만리교에서 도망하였다가 몸을 팔아 부친을 구한 일, 기생이 된 후에도 장필성을 잊지 아니하고 있다가 글을 통해 장필성을 만난 이야기를 다 한다.

"대감의 하늘 같은 은혜는 결초보은하여도 잊지 못하겠나이다."
하며 다시 엎드려 운다.

감사는 송이의 등을 정답게 어루만지며,

"송이야, 송이야, 울지 마라. 네 사정이 그런 줄 몰랐느니라. 그러나 이제는 알았으니 어찌 네 소원을 못 풀어 주겠느냐. 이제 보니 장필성도 사정이 있어서 이방으로 들어온 게로구나. 내일은 장필성을 불러 만나게 해 주겠다. 눈물이라 하는 것은 사람 마음의 지극한 이슬이라. 그래서 억울하고 그리워도 눈물이 나는 것이요, 좋고 반가워도 눈물이 나는 법이니라."

<후략> 이보국이 송이(채봉)의 사정을 알고 난 후 강필성을 만나게 해 주며, 허 판서가 역적죄로 파멸되었다고 일러준다. 김 진사가 부인과 돌아오고, 채봉과 강필성은 결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