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의전                                        -작자 미상-

 

 

<앞부분 줄거리> 안평국 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 항의는 모질고 아우 성의는 어질어, 왕과 왕비는 성의를 세자로 삼고자 하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항의를 세자로 삼는다. 왕비가 우연히 병에 걸리자 항의는 모른 체하지만 성의는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간호한다. 이때 한 도사가 나타나 왕비를 진맥한 후 서역 청룡사에 있는 일영주(日映珠, 왕비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한 것으로, 갈등의 구체적 원인이 되는 소재)로만 왕비의 병을 고칠 수 있으며, 그것을 구해 올 수 있는 사람은 성의뿐임을 알려 준다. 성의는 고난 끝에 그의 효성에 감동한 한 신선의 도움으로 일영주를 얻는다. 그러나 성의가 일영주를 구해 오면 민심이 성의에게 돌아갈 것을 두려워한 항의는 돌아오는 성의를 만나 일영주를 빼앗고 성의의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든다. 맹인이 되어 표류하다가 무인도에 도착한 성의는 단저(짧은 피리)를 만들어 불었는데, 마침 이 소리를 듣게 된 중국의 사신 호 승상에게 구출되어 중국으로 가게 되고, 천자의 궁궐에서 머물게 된다. 성의의 피리 소리를 듣게 된 채란 공주는 감탄하며 서로 음률을 연주하고 시를 화답하는 가운데 성의의 인품에 존경심을 갖게 된다.

안평국 왕비는 성의를 보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병세가 점점 더해 갔다.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십여 세 어린아이(둘째 아들 성의)가이상한 도사의 말(서역 청룡사에 있는 일영주로만 왕비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어미를 위하여 만리창파에 어디로 정처 없이 갔는고? 망망창해의 파도는 매우 세차게 일고, 구름 걸린 산봉우리는 첩첩한데 어느 날에 다시 돌아올꼬? 한번 떠난 후로 생사를 알지 못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이제 다시 못 보고 죽으면 어찌 눈을 감을쏘냐?" 하시며 슬퍼하셨다.

이때에 항의가 마음 속으로 헤아리기를 '부왕과 어마마마께서 성의를 본디 사랑하시거늘 만일 약을 얻어와 환후가 회복된다면 성의를 더욱 사랑하실 것이고, 온 나라에 그 아름다운 이름이 진동할 것이다. 그리 되면 내 어찌 왕위를 바라겠는가.'(맏아들인 항의는 자신이 성의와의 왕위 경쟁에서 불리하다고 여기고 있음) 하고 이에 왕과 후께 말하길,

"서천에 간 지 이제 반 년이 다 되도록 성의의 소식이 묘연하오니, 소자가 길 중간에 가서 성의의 소식을 알아보옵고 혹시 높은 파도에 불행한 일이 있었으면 소자가 서천에 가서 약을 구해 오리이다."
하며 하직을 아뢰고 배를 준비해서 사공과 무예가 있는 사람으로 십여 명을 데리고 서천으로 향하였다.

배를 출발한 지 삼 일만에 풍파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해변에 닿아 배를 머무르고 밤을 지낼 때, 문득 서쪽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빠르게 오고 있거늘 항의가 의심하여 크게 외쳐 말하길,

"앞에 오는 저 배가 안평국의 대군(성의)이 탔던 배가 아닌가?"
하니 성의 문득 그 외쳐대는 소리를 듣고 기뻐서 배를 대고 보니 이는 곧 세자 항의라.(
사건의 우연성) 슬프다! 항의의 불순한 음모를 성의가 어찌 알리오. 슬프고 불쌍하다.(서술자의 편집자적 논평)

항의가 이때 흉계를 꾸몄는지라. 성의를 보고 일러 말하길,

"아우가 멀고 먼 물길을 홀로 간 것이 위태로워서 부왕의 명을 받자와 도중에 이렇게 널 맞이하거니와 일영주를 구해 왔는지 모르겠구나."

성의는 그 형의 나쁜 마음을 모르고 일영주를 건네주며 어마마마의 병세를 물으니, 항의가 갑자기 약을 받고 말하길,

"아우가 떠난 후로 어마마마의 병세가 호전되어 지금 네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노라."(거짓말을 하는 항의)

성의가 말하길,

"병세가 좋아지셨더라도 이 약을 쓰면 더욱 상쾌해지실 것입니다."
하는데, 항의 문득 배 위에 높이 앉으며 큰소리로 꾸짖으며 말하길,

"네가 거짓으로 서천에 가 일영주를 얻어오겠다 하고 병든 어마마마를 버리고 불도(佛道)에 빠져서 이제야 돌아오니 이는 천하에 있을 수 없는 불효이니라. 이제 어마마마께서 너를 보면 병세가 더욱 나빠지실 것이니 너희들은 빨리 물에 빠져 부왕의 명을 순순히 받들라."

성의가 이 말을 듣고 정신이 아득하여 말없이 앉아 있다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길,

"소자 온갖 어려움 끝에 약을 얻어 온 것이 어마마마를 위함이었습니다. 형님께서 무슨 의사로 부왕의 명령을 핑계 삼아 죄가 없는 우리를 죽이고자 하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형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여기는 성의) 이 몸은 이 물에 빠져 죽어도 조금도 서럽지 않습니다. 다만 병중에 계신 어마마마의 얼굴을 다시는 뵙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으며 천추(千秋, 천 년=오랜 시간)의 무궁한 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저 때문에 수십 명의 사람이 죄없이 죽임을 당할 것이니 어찌 아니 가련하리오. 슬프도다! 하늘과 땅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하고 크게 울어대니 해와 달이 그 빛을 잃고 풀과 나무들도 모두 슬퍼하는 듯하였다.(성의의 슬픔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과장함)

선인들이 또 성의를 붙들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우리 수십 명이 공자를 모시고 창파만경에 도달하여 선경에 들어가 일영주를 얻어 와서 왕후의 환후를 나으시게 하면 우리들이 중한 상을 받을까 하고 바랐는데, 죄없는 죽음을 당하니 어찌 망극하지 않으리오? 우리들의 소견으로는 대군을 모시고 대궐에 들어가 일영주를 바치고 왕의 처분을 기다려 죽으면 여한이 없을까 합니다."
하니 항의가 이 말을 듣고 대로하여 무사를 재촉하여,

"죽여라."
하니 선인(船人,
뱃사람)들이 크게 외치며 말하길,

"대군(성의)과 우리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모두 다 죽이라 하십니까? 머나먼 하늘 끝 서역에 가 큰 공을 이루어 돌아왔거늘 남이 이룬 공을 도중에서 탈취하고, 아울러 인명을 살해하려 하니 하늘이 무심하신 탓이로다. 절절히 원통하도다. 12세 우리 대군의 지극한 효성, 천지도 무심하고 귀신들도 야속하네. 정성으로 일영주를 얻어 돌아온 태산같이 높은 공이 아무런 보람도 없게 되었구나. 우리들이 죽는 것은 그렇게 서럽지 않으나 12세 청춘 공자는 모친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다가 골육상쟁하는 까닭에 바닷속 고혼이 되겠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더러운 너희들의 손을 빌어 죽을 바가 아니로다."
하고 서로 목을 껴안고 슬피 우니 그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선인들이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 대군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겠는가?"
하고 서로 손을 잡고 공자를 위로하여 배 가운데 앉히고 애고 소리를 외치며 배 안의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만경창파에 뛰어들어 죽어 가니 이 거동은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때 항의가 무사에게 눈짓하여 성의를 죽이려고 하는데 무사 중 태연(조력자, 죽음에서 구해주는 인물)이라 하는 사람이 큰 소리로 이르기를,

"세자께서 비록 왕명을 칭하나 어찌 동기간의 인륜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공자는 지극한 효자이신데, 세자께서는 어찌 인정이 이와 같습니까?"
하고 칼을 들어 모든 무사를 물리쳤다. 항의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성의의 두 눈을 칼로 찔러 빼니 성의가 배 안에 엎어지며 두 눈의 피가 흘러 얼굴을 적셨다. 이어서 성의가 탄 배의 조각을 깨뜨려 한 조각 위에 그를 앉히고 물결 위로 밀어 버리니 궁금하도다. 그가 죽을지 살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편집자적 논평) 천지신명께서 효자를 보존케 하실지 그 종말을 두고 볼지어다.

<중략>

각설. 안평국 왕비 병세 쾌복하나 성의의 사생존몰(死生存歿, 살아있음과 죽음)을 몰라 주야 슬퍼하더니, 일일은 성의 있던 방에 들어가니 산호 서안(산호로 만든 책상)에 만 권 서책은 의구하나(변함이 없음) 형용(성의의 모습)이 돈절(頓絶, 끊어짐)한지라, 심회 감창(感愴, 가슴에 사무쳐 슬픔)하여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옷깃을 적시며 슬피 통곡하더니, 홀연 기러기(감정이입된 소재, 왕비의 소식을 성의에게 전달함) 슬피 울거늘 왕비 울음을 그치고,

"네 비록 금수나 성의의 소식을 전코자 왔느냐?"
하고 눈물을 금치 못하더니, 기러기 또 울거늘, 괴히 여겨 시녀더러 물으니, 대왈,

"이 기러기는 공자(성의)가 기르시던 바이라. 연전(年前)에 공자 임행(臨行, 행동함)시에 기러기를 쓰다듬어 경계 왈, '네 나로 더불어 일시도 떠남이 없더니, 내 이제 곤전(坤殿, 왕비가 거처하는 궁전) 환후하여 만리원정(萬里遠程, 먼 길)에 가, 약을 구하여 올지라. 기간 원별(遠別, 긴 이별)을 당하매 창연(愴然, 슬픔)한지라. 너는 모름지기 처소를 떠나지 말고 부디 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라. 만일 무슨 소식이 있거든 곧 전하라. 지금 떠나매 언제 서로 모이리오.' 하시니, 기러기 대답하는 듯 응하여 울거늘, 공자 등을 어루만져 가장 사랑하시고 가신 후, 우금(于今, 지금까지) 나가지 아니하옵기로, 궁녀 등이 밥을 먹이옵더니 요사이 밤이면 슬피 울거늘 이상하오나 내전이 초원(稍遠, 떨어져 있어 멀어)하옵기로 낭랑(왕비)이 모르심이니이다."

왕비 청파에 시녀 등을 대책(大責, 크게 꾸짖어)하사 왈,

"여등(汝等, 너희들)이 이런 말을 나더러 아니 한다."

궁녀 등이 황송하여 머리를 숙이더라. 왕비 즉시 기러기를 어루만지시며 왈,

"네 비록 미물이나 네 임자(성의)가 있는 곳을 알지니, 서천에 들어가 살았느냐? 망망대해에 죽어 어별(魚鱉, 물고기와 자라)의 밥이 되었느냐? 만약 살았거든 내 앞에서 세 번 울라."
하시니 기러기 목을 늘이어 세 번 울거늘,(
전기적 요소) 왕비 기뻐하사 왈,

"네 아는도다!"(기러기가 성의가 살아 있음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놀라고 기뻐함.)
하시고 즉시 일봉 서찰을 쓰시며 왈,

"네 임자가 살았거든 이 편지를 전할소냐?"

기러기 머리를 세 번 조아리거늘, 왕비 즉시 서찰을 기러기 다리에 매고 경계 왈,

"네 두 날개로 만리를 가는 재조라. 부디 이 글을 잘 전하라."
하니 기러기 세 번 소리하고 두 날개를 치며 청천(靑天)에 올라 운간(雲間)으로서 서북을 향하여 가는지라. 왕비 보고 기꺼하여 천우신조하여 소식 듣기를 바라며, 궁중 시녀 등이 다 희한히 여겨 기꺼하더라.

이 말이 자연 전파하여 항의 듣고 기러기를 마저 죽이지 못함을 한하며, 무사에게 가만히 말하되,

"제(성의) 비록 와룡지재(臥龍之才, 제갈량의 재주) 있어도 살지 못하리라." (성의의 죽음을 확실히 믿는 항의)

서로 말하나 의심이 없지 아니하더라.(직접 죽이지 않았기에 의심이 남아 있음.)

차시, 공주(중국의 채란 공주) 침전(잠자는 방)에 홀로 앉아 글을 외우다가 사창(여자의 방에 딸린 창문)을 열고 보니 금풍(金風)이 소슬하고 행엽(은행잎)이 표락(飄落, 바람에 흩날려 떨어짐)하매 심사 자연 초창(초愴, 슬프고 근심함)하여 벽옥더러 왈,

"하절이 이미 진(盡)하고, 추절을 당하며 벽로 오동잎에 떨어지니 물색이 소조(蕭條, 고요하고 쓸쓸함)하니 호화(호탕하고 화려한)한 사람도 심사가 좋지 못할 것이거든 하물며 만리 타국의 오로운 객(성의)의 심사야 오죽 슬프리오."(성의를 걱정하는 공주)
하니, 벽옥이 대왈,

"북천의 기러기는 남으로 돌아오고 연자(제비)는 강남으로 가며 대 수풀 아래 국화가 만발하고 벽간에 실솔(귀뚜라미)이 슬피 우니, 사람의 수회(슬픔과 근심)를 금치 못하거든, 고국을 떠나 만리타향에 고초(고난, 고통)하는 사람(성의)이야 일러 무엇하리.(설의법, 성의의 근심과 걱정은 더할 것이라고 여기는 공주의 하녀 벽옥)  소동(小童)을 한 번 청하여 외로운 심사를 위로함이 좋을까 하나이다."
하니 공주 묵연양구(默然良久,
한참 말없이 있다가)에 왈,

"인정은 본디 그러하나 외간 남자를 자주 불러봄이 예모(예절에 맞는 모습)에 손상할까 저어하노라(두려워하노라). 그러나 네 이미 발설하였으니 청하여 오라."

벽옥이 승명하고 즉시 후원에 나아가 성의를 부르니, 차시 성의 마침 잠이 깊이 들었다가 놀라 일어나 앉으며 왈,

"뉘라서 나를 찾나뇨?"

벽옥이 대왈,

"내노라."
하니 성의 공주의 시녀 벽옥인 줄 알고 반가운 마음이 측량 없어 잠깐 생각하되, '아까 꿈이 비상하니 오늘날 일정은 좋은 일이 있을랏다.'하고 대답하여 왈,

"그대 궁중의 시녀로서 이런 심야에 나 같은 천인을 찾으니 무슨 일이 있나뇨?"

벽옥이 대왈,

"옥주(공주), 그대를 청하심이니라."

성의 즉시 옷을 고쳐 입고 벽옥을 따라 금각당에 올라가니 공주가 반겨 좌(자리)를 주고 문 왈,

"그 사이 객고(客苦, 나그네의 고통) 어떠하뇨?"

성의 대왈,

"천생(賤生)이 성상(황제)의 해활지덕(海闊之德, 바다같이 큰 덕)을 입사와 아직 일신이 편하니이다."

공주 시녀를 명하여 진수성찬을 내오고 향온(술)을 전하고 상을 물리매, 혹 단저도 불고 혹 단금도 희롱하며 각각 시(詩) 몇 수를 지어 화답하며 서로 칭찬하더니 문득 월색이 명랑하며 홀연 동남으로서 기러기 슬피 울며 점점이 가까이 와 중천에서 금각당으로 돌아다니며 울거늘, 공주와 좌우 시녀 나와 하늘을 우러러 살펴보며 심히 괴히 여겨 서로 볼 즈음에, 성의 기러기 우는 소리를 듣고 혼백이 비월(飛越, 날아 넘어감)하여 생각하되, '이 짐승이 반드시 나의 기르던 기러기로다.'하고 정신이 어린 듯 취한 듯하여 앉았더니, 기러기 두 날개를 펴며 점점이 내려와 성의의 앞에 앉으며 목을 늘이어 슬피 울거늘 성의 그제야 쾌히 본국 기러기 온 줄 알고 급히 두 손으로 기러기를 덥석 안고 그 등을 어루만지며 울어 왈,(우연성)

"네 이제 나를 찾아왔으니 중전께서 반드시 승하(돌아가심)하시도다."(기러기가 온 것을 기러기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러 왔다고 여기는 성의)
하고 언파(
말을 마치고)에 엎어져 혼절하거늘, 좌우 시녀 급히 구할 새, 공주 살피어 보니 기러기 다리에 일봉서(一封書)를 매었거늘, 바삐 끌러 본즉 피봉(皮封, 겉봉)에 하였으되,

'안평국 국모는 내 아들 성의에게 부치노라.' 하였거늘, 공주 이르되,

"기러기 다리에 일봉서가 매여 있으니, 그대는 정신을 수습하면 내 떼어 읽으리니 자세히 들으라."

성의 정신을 차려 듣기를 다하매 가슴이 미어지고 간장이 스는 중 타는 중, 일변 반갑고 일변 처창(悽愴, 몹시 구슬프고 애달픔)하매, 정신이 쇄락하여(기분이 시원하고 상쾌하여) 바삐 일어나 배사(拜謝, 사례함)할 제, 문득 두 눈이 번개같이 뜨이니,(전기성, 비현실성) 비컨대 구년지수(九年之水, 구 년 동안의 장마)에 햇빛을 본 듯, 칠년대한(七年大旱, 칠년 동안의 가뭄)에 빗발을 본 듯, 청천에 뛰어오른 듯하여 생시인지 몽중인지 깨닫지 못하여 도리어 어린 듯 정신이 황홀한지라.

 

<중략 줄거리> 어머니가 기러기 발에 매어 보낸 편지를 받은 성의는 감격하여 두 눈을 뜨게 되고,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공주와 가약을 맺은 후 기러기 발에 편지를 매어 고향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때 안평국 왕비가 기러기 발에 편지를 매어 보내고 화답 오기를 밤낮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왕이 내전에 들어 왕비와 더불어 옥루에 올라 난간에 비기어 앉아 성의를 생각하시고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홀연 기러기가 중천에 높이 떠서 긴 소리로 아뢰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쏜살같이 내려와 왕비 앞에 앉거늘, 왕비가 기러기만 보아도 성의를 본 듯하여 기러기를 덥석 안고 어루만지며 살펴보니 기러기가 발에 한 통의 편지를 매고 왔는지라. 일희일비하여 급히 풀어 뜯어보니 그 사연에 이르기를,

"불효자 성의는 삼가 백배하옵고 부왕 전하와 모비 마마께 올리나이다. 이별이 오래되었사온데, 양 전하의 기후 강녕하심을 기러기 편으로 듣자오니 반갑고 설운 마음 헤아릴 길이 없사옵니다. 연전에 모비의 병환을 위하여 슬하를 떠나 서역을 갈 때에 천신만고 끝에 십생구사(十生九死, 아홉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로 수만리 서천에 이르러 일영주를 얻었습니다. 돌아오던 도중 바다 가운데서 포악한 변(형 항의가 자신을 해한 사건)을 만나 뱃사람 일행을 모두 죽이고 장차 소자를 죽이려 할 때 거느린 군사 중에 태연이라 하는 사람의 힘을 입어 목숨은 보전하였사오나 두 눈을 잃고 한 조각 나무판에 태워져 푸른 파도 속으로 밀쳐졌으니 십이 세 어린 것이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파도에 밀려서 지향 없이 가옵더니 여러 날만에 겨우 한 섬에 닿았습니다. 짐작하니 언덕이어서 더듬어 보니 바위가 있기에 바위 위에 올라 정신을 수습하였더니 바람결에 대 우는 소리가 들려 내려가 더듬어 보니 과연 대밭이 있었습니다. 대를 베어 단저(짧은 피리)를 만들어 슬픈 마음을 덜고 앉아 오작(까마귀와 까치)에게 실과를 얻어먹고 있었더니,(전기성, 천우신조) 천지신명이 도우시사 중국 호 승상(구원자, 조력자)이 남일국의 사신으로 다녀오시는 길에 소자를 데려다가 보살핌을 입어 승상부에 머물게 되었던 일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부마(공주의 남편)된 전후 사연과 호승상의 수양자(수양아들)된 말씀을 낱낱이 아뢰고, 공주와 더불어 고국으로 즉행하오니 또 중도에 무슨 변이 있을지 모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양친은 살피옵소서."(그 간의 사건을 편지를 통해 부모에게 알려줌.)
하였더라.

왕비가 보기를 다함에, 전하는 다 듣고 나서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시더라. 왕비가 기러기를 붙들고 통곡하여 슬퍼하시더니, 이때 세자 항의(반동 인물)가 왕비의 곡성을 듣고 크게 놀라 들어가 엎드려 여쭙기를,

"모후는 무슨 까닭으로 이렇듯이 비창(마음이 몹시 상하고 슬퍼함)하십니까?"

왕비가 항의를 보고 잠잠하시거늘 항의가 일어나 사면을 살펴보니 서안에 일봉 서찰이 놓였고 또 기러기를 어루만지시거늘 자세히 보니 이는 곧 성의의 필적이었다. 항의가 말하기를,

"서간을 보오니 성의가 중국에 들어가 입신양명하여 부마가 되었다 하니 이는 부왕의 성덕이거늘 어찌 그리 슬퍼하십니까? 빨리 예단을 갖추어 마중 나가시옵소서."
하더라. 왕비가 그날로 예단을 갖추어 중로에 사신을 보내었다. 이때 상(
왕)이 항의에게 칙교(勅敎, 명령)하기를, '중전을 모시고 떠나지 말라.' 하셨다.

차설, 항의가 마음속으로 헤아리되, '성의가 틀림없이 죽은 줄로 알았는데 어찌하여 살았으며 이다지 영귀하게 되었는고. 만일 성의가 오면 나의 전후 행적이 발각되겠구나.' 하고 매우 근심하다가 한 계교를 생각하고 노복에게 분부하여 적부리를 부르니, 이 사람은 지혜와 용기가 매우 많았다. 이날 항의가 적부리를 청하여 후히 대접하고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위하여 오백 군사를 거느리고 중로에 나가 매복하였다가 성의 일행을 쳐서 함몰시키고 돌아오면 천금의 상을 아끼지 않겠다. 그리고 내 장차 왕이 되는 날 무거운 소임을 맡길 것이니 그대는 힘을 다하여 성사케 하라."

 

<중략>

 

적부리가 정신을 진정하여 살펴보니 한 소녀(중국 공주)가 말을 타고 진전에 횡행함이 제비 같은지라. 적부리가 분을 참지 못하여 달려들어 칠십 여 차례가 되도록 승부를 결정지을 수 없었는데, 기러기가 또 날개에 모래를 묻혀 적부리의 얼굴에 뿌려 두 눈에 모래가 들어가 눈을 뜨지 못할 때에 공주의 칼이 번뜩하더니 적부리의 머리가 말 아래로 떨어졌다.(여자 영웅의 활약상)  

이때 적진 중에서 적부리의 죽음을 보고 또 한 장수가 장창을 들고 내달아 크게 외쳐 말하기를,

"너는 조그만 여자이다. 내 형을 죽이고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
하니 이는 부리의 아우 문이라. 오백 근 철퇴를 들고 달려들어 싸울 때에, 황성 장졸이 접응(接應,
맞서 싸움)하여 공주를 도우니 창검이 서리 같았다. 문이 더욱 분하여 서로 싸워 칠십여 합에 이르러도 서로 승부를 결정짓지 못할 정도로 검술이 신묘하니 참으로 적수였다.(난형난제, 막상막하, 용호상박)

공주가 정신을 진정하여 무슨 경문을 외니 문득 공중으로부터 오방신장(五方神將, 다섯 방위를 지키는 신)이 내려와 좌우로 적문을 치며 호령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더라.(전기성)  문이 황겁하여 도망하고자 하더니 문득 공주의 검광이 빛나며 문의 머리가 검광을 따라 떨어졌다. 공주가 칼을 들어 적부리의 군사를 치고자 하다가 문득 깨닫고 '적부리의 군사는 곧 부마국 백성이다.' 하고 일제히 호령하여 세우고 큰 소리로 깨우쳐 돌려보내니, 군사들이 물러나와 공주의 은덕을 송덕하며 만세를 불렀다. 군사 한 사람이 아뢰기를,

"망발(욕되게 하는 말이나 행동)스런 모습이 되었사오니 소졸들이 전배(前陪, 길을 인도함)함을 바라나이다." 하거늘 공주가 허락하여 앞세우고 황성 일행은 뒤를 따라 일행과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가니 거리마다 송덕하며 만민이 모두 천만세를 부르며 남녀노소 없이 다투어 구경하더라.(중국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어 금의환향하는 성의)

 

<후략>